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 이야기 (조금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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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잘못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조선시대 후기, 말기로 접어들면서 족보 구입, 공명첩 남발 등으로 신분제가 크게 무너져서 나중에는 양반이 70%까지 증가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죠.
이건 조선시대 호적 자료에 기재된 직업 명칭을 그냥 기계적으로 분류한 것에서 비롯된 주장이었습니다. 지금 주민등록 등본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호적에도 자신의 직업(정확히는 직역 = 개인에게 부여된 의무 명칭)을 적어왔는데, 각 지역별로 할당된 직업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충남 천안군이라고 하면,
중앙군(전쟁시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군대) 예비군 2,000명
지방군(천안군 예비군 대대) 예비군 500명
천안군청 직원 100명
천안역 직원 50명
천안 국가공장 100명
천안 교육기관 소속 100명
양반 100명
이런 식이죠.
근데 이 직업 명칭에 할당된 인원(TO)이라는 게 조선시대 전기나 후기에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 명단을 토대로 동원훈련도 하고 세금도 걷고 그랬는데 말이죠.
조선후기로 들어 인구가 늘어나자, 앞쪽에 기재된 예비군 숫자, 공장 소속 인원 등을 다 채우게 되죠. 이렇게 필수 직업 명칭만 채우면 나머지는 어느 정도 유동적으로 기재할 수 있었는데, 이 등재 기준이 18세기, 19세기 들어서면서 점점 느슨하게 됩니다.
양반 직업 명칭 가운데 대표적인 게 '유학(幼學)'입니다. 이건 그냥 아무런 관직도, 품계도 없는 양반에게 부여된 직업 명칭(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양반은 살아 있으면 '유학', 죽으면 '학생'으로 기재했던 것이죠. 지금도 제사 지방에 쓸 때 '학생부군신위'라고 하는 것의 학생이 바로 조선시대 양반의 사후 명칭입니다.
대표적인 양반 직업 명칭
유학 : 살아 있는 사람
학생 : 죽은 사람 (유학인 사람의 아버지, 할아버지 등)
품계 : 품계를 획득한 사람 (양반이 아니어도 품계 획득 가능)
관직 : 관직을 지냈거나 현직에 있는 사람 (관직 경력이 있으면 그 관직을 길게 다 씀)
유생 : 향교 등에 소속되어서 있는 사람 (양반의 자제들)
한량 : 무과 과거시험 준비하는 사람 (나중에 건달과 비슷한 의미가 되기도 하죠)
생원, 진사 : 1차 과거시험 합격자는 합격한 시험의 명칭을 씀
하여간, 대략 이런 명칭들이 양반의 직업으로 기재되었는데... 앞에 적었다시피 18세기, 19세기 들어서면서 양반이 아닌 중인층(고을 아전, 향리, 양반의 서자, 서자 후손들), 심지어는 평민들까지 호적에 '유학'이라고 적는 것이 어느 정도 허용됩니다.
특히 수많은 서자, 서얼의 후손들은 원래 '업유(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 '업무(무예 닦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라고 적어야 했지만 그들의 아들, 손자 세대가 되면 양반 명칭인 '유학' 또는 '한량'이라고 쓰는 게 합법적으로 허용되기까지 하죠. 한자를 배운 향리 후손들도 '유학'을 쓰게 했고요.
지금과 비교하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4년제 종합대학에만 총장이 있었고 단과대학이나 2년제 대학은 학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명칭도 2년제는 반드시 '전문'이 포함되어야 해서 전문대학이라고 했고 마지막도 '대학'으로 끝나야 했죠. '대학교'는 4년제 전용이고요. 그런데 시간지 지나면서 2년제 대학도 '대학교'로 부를 수 있고 '전문' 글자를 안 써도 되며, 작은 학교들도 총장이라고 부를 수 있게 허용되었습니다. 명칭 사용이 느슨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2년제 대학이 4년제처럼 4년간 운영되지는 않죠. 선발 인원도, 학과 규모도 다르고요. 현실이 명칭과 다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00년 후에 미래인들이 2024년 대한민국 대학 목록을 발견해서 모두 '대학교'라고 되어 있고 '총장'이라고 되어 있으니 21세기초 대한민국에는 4년제 종합대학만 150개가 있었고, 2년제는 5개 정도만 있었다고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평민들이 '유학'이라는 호칭을 호적에 쓰는 것은 조금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공명첩도 구입하고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길게는 100년 정도에 걸쳐서 3~4대가 꾸준히 호적 기재 내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했죠.
뭐, 어찌 되었든지 행정적으로, 서류상으로 양반 직업을 기재할 수 있었으면 양반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적 문서에 적힌 직업 명칭이었을 뿐이고, 실제 세계에서 양반으로 인정 받았으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99%도 아니고 100% 완전 다른 이야기였죠.
중인층, 평민층 중에 호적에 직업이 '유학'으로 되어 있었어도 여전히 그들은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고 제대로 된 관직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진짜 양반 가문들과 서로 혼사를 맺거나 양반 사회에 편입될 수 없었고요. 지역 주민들도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서로 혼인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진짜 양반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핵심 구분선이었죠.)
위로 3~4대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양반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본인 기준으로 위로 4대까지 직업과 이름을 호적에 적어내야 하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위로 4대가 과거에 붙지 못하거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면
학생 고조부 아무개,
학생 증조부 아무개,
학생 조부 아무개,
유학 부 아무개
유학 본인
이렇게 적어야 했기에 나중에 '학생', '유학' 명칭을 중인, 평민들도 쓸 수 있게 된 때가 되면 그들과 호적 기록상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선조가 아무런 관직에 나가지 못했어도 지역에서 양반 행세를 하는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본인 직계 가족만 있는게 아니라 외조모, 외할머니, 처(장인) 집안도 있고 사촌, 팔촌까지 가면 한두 명 정도는 과거에 붙거나 관직에 나가거나 하다못해 품계라도 얻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거든요.
아예 그런게 없었다고 해도 양반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집성촌을 이루며 사는 것이라서 때가 되면 명절 때나 제사 때 문중이 모이고 관혼상제에 참여하고 서로 어울려 지내면서 양반의 후손임을 입증하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죠. '300년 전에 군수 벼슬을 지낸 아무개의 8대손입니다. 중간에는 다 백수였네요.'이라고 해도 (조금 부끄럽기는 했겠지만) 여전히 양반이었던 것이죠.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평사리라는 곳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양반은 딱 2가구입니다. 최서희의 최씨(최참판댁) 가문, 그리고 몰락 양반인 김평산(김위관) 가문이죠. 소설 시작 배경이 1890년 전후이고 박경리 작가가 보고 들었던 내용에 기반했는데도 실제 양반은 얼마 안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 전후로 이렇게 행정상 분류와 실제 당시의 신분 비율, 현실은 달랐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들이 이어지면서 최근에는 조선 후기 양반 70%설이 거의 깨진 상태입니다. 그냥 호적 기록만 그랬을 뿐이라는 것이 정설이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양반 비율은 많았을 때도 전체 인구의 10~15%를 넘지 않았다고 봅니다.)
물론, 신분제 동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사회적 체제가 느슨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대한제국이 되면서 급격하게,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해체되었죠. 이러한 장면들은 소설 토지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오늘 일이 조금 한가해서 생각나는데로 막 적다 보니, 횡설수설하네요. 앙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해방두텁바위님의 댓글의 댓글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여름날의배짱이님의 댓글
족보에 나온 돌림자 양반 가문의 허와 실도 (시간 되실때) 가르쳐 주세요.
밀양박씨 규정공파 가문이라는데
저의 어리석음과 가난함으로
출신을 의심하고 있어요.
가난하지만
제삿상 뽀지게 차리는거 보니 더 의심도 되구요(정통 종가집은 간소하게 지낸다 해서..)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조선시대에 족보를 구입한다고 양반 행세를 할 수 없었던 것도, 구입한 족보만 가지고 양반임을 입증하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간행된 여러 판본이 있어서 교차 검증할 수 있었죠. 족보 하나만 보고 믿지도 않았지만요.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바로 윗대와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든지(서자일 가능성 증가), 묘소 위치가 엉뚱한 곳에 있다든지(양반의 특징은 자주 이사를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성촌을 이루죠.), 앞뒤 다른 집안과 돌림자, 이름 등이 다르다든지 하는 등의 차이가 그것이죠. 그리고 뭔가 이상하게 여기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 내용이 옛날 족보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추가 검증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족보만 아니라.. 집안 가장 어른 집(종손, 장손)에 연원이 닿는다면 그 집안에 옛날 문서가 있는지 물어보셔도 좋고요. 선조들 과거 합격증, 관직 임명장, 또는 가첩, 가승, 호적 자료(호구단자) 등등 그런 자료들이있다면 한층 실제 족보 문중의 후손을 가능성이 높아지죠.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수선영님의 댓글
돈 좀 있다보니 종친회에서도 긍정적이었는데, IMF로 사업이 다 날라가서 무산되었습니다.ㅎㅎ
Gesserit님의 댓글의 댓글
HENE님의 댓글
heltant79님의 댓글
조선 신분제를 폄하하는 주장 중 대표적인 게 전인구 70% 양반설과 전인구 2/3 노비설인데,
두 주장이 양립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폄하하려고 막 갖다 쓰더라고요.
WindBlade님의 댓글
크로롱크로롱님의 댓글
또한 에도시대 막바지에 사무라이가 상인들의 빚 독촉을 못이겨 야반도주 하거나 가족모두 할복했던 상황처럼 조선후기에도 우리나라에 양인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던 싯점입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이루고 중앙 정치에도 활발히 진출하던 시기입니다. 영,정조 시기 부터는 과거 급제자의 거의 절반이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노비제도의 혁파가 있기 훨씬 이전에 소작제도의 잇점을 알아차리고 전국 각지에서 노비 문서 태우고 소작농으로 바꿔주던 시기도 이때였고 경제적인 이유로 양반 혹은 양인들 스스로가 자신 혹은 가족을 노비로 팔던 시기도 이때입니다. 그만큼 신분의 이동이 위아래로 무척 다양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양인들이 족보를 사고 양반의 호적에 올리는 문제가 과연 쉽게 이루어질수 있었냐는 부분인데, 사실 조선말에는 인구의 이동도 무척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족보는 이미 그 이전부터 양인들도 가지고 있었고(주로 자기 동네 본관이나 성씨가 아닌 다른동네), 부를 이룬 노비들도 이러한 신분 이동이 그리 어렵잖게 행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이 족보나 호구대장의 신빙성을 논할려면 사실 조선 후기 이전의 시기만이 유효할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우리가 잘못 알수 있는것중의 하나가 집성촌의 성씨가 원래부터 그것이었냐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알수 없는것이 맞습니다. 부자 3대를 갈수 없다는 말은 우리의 상속 제도가 자녀 성별, 신분(서얼)에 상관없는 균등 상속제도이기에 웬만한 부자가 아닌 이상 그 부를 계속 이어갈수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과거에 나갈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그 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할수 없었던 양반의 경우 그 집안 자체가 그 지역사회에서 미미한 역할을 할수 밖에 없는것이 조선의 후기였습니다. 그럼 그 지역에서 지역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동의가 있느냐는 부분은 사실 3세대만 지나가면 아무 의미가 없을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노비의 경우는 서양의 노예와는 확연히 다른 의미였고 신분의 차이에 따른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는것이라는 점이 다양한 문서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어지지만 단절된 역사적인 시기가 너무도 커서 그 신빙성에 조금은 의문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조선 이야기 너무 좋아요. ^^
하늘기억님의 댓글
‘학생’의 후손은 아닌것 같습니다.
작은 비율에 든다는게 쉽지는 않아보이네요.
날개달기님의 댓글
학생부군신위의 의미를 이제 알았네요. 할아버지 그 윗대 모두 학생이라기에 제사때마다 무슨말일까 했거든요 -_-;(
해방두텁바위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