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페이지] K-페이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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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4년이 흘렀다.
몇 개월이면 완성하지 않을까 예측했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몇 번이나 넘어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언제가 끝일까 싶었는데,
드디어 결과물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고, 곧 이 프로젝트도 종료될 것이다.
참여 기간 동안 고액의 연봉,
몇 십 년을 일해도 절대 모을 수 없는 연봉을 뛰어넘는 성과비를 약속했었다.
내 계좌에 열 개가 넘는 공이 찍힌 금액을 몇 번이나 다시 세어보았다.
그리고, 체크아웃 룸에 들어갔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 동안 진행했던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이 말끔하게 지워진다.
대신, 이제 지긋지긋한 일이라는 굴레에서 완벽하게 탈출한다.
부분 기억의 소거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면, 나는 4년 동안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된다.
그래도, 이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프로젝트를 했던 4년 동안 연구소 밖을 나간 적도 없고, 나갈 수도 없었으니,
기억이라는 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머리를 쥐어짰던 그런 기억 밖에는 없다.
그 동안의 기억을 싹 지운다고 하면.. 오히려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상상해보라, 난 아무 기억도 없는데, 내 계좌에는 거금이 들어가 있다.
어쩌다 거울을 보면, 얼굴에 갑자기 늘어난 주름들에 살짝 당황할 수는 있겠지.
이 정도가 전부다. 저울질을 아무리 해봐도 이건 참 매력적인 딜이었던 것 같다.
체크아웃 룸에서 나왔다.
바람이 차갑다. 내가 어떤 계절에 들어가게 되었던가? 여름이었나?
자, 이제 무엇을 할까, 우선 최고급 호텔을 예약하자. 이제 시작이잖아.
땅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지?
척척척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 장갑차와 탱크들. 무.. 무슨 일이야?
"어이! 거기, 거기! 멈춰!!"
군인 하나가 뛰어오며 외쳤다. 숨이 덜컥 막혔다. 얼어붙었다.
"너 뭐야! 지금 몇 신데 돌아다녀!! 저 xx 잡아!"
내가 연구소에 세상으로 나온 날, 2024년 12월 4일 새벽.
불과 4년 만에 내가 알던 세상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 필립 K. 딕의 소설 '페이첵'의 소재의 일부를 가져와서 글을 써봤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