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나의 80년대 (6)

페이지 정보

108 조회
6 댓글
5 추천

본문

교사는 노동자인가?

민주화는 결코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는 것이고, 수 많은 사람들의 피값으로 얻어지는 것이리라. 어린 나에게 그런 것이 온전히 와닿을 리는 없었겠지.

그래도 기억을 들추어보면, 80년대는 유난히 노동조합 결성과 노사분규가 많았던 때였고, 사회가 시끌시끌했다고 기억된다. 아니, 언론이 유독 사회가 시끄럽고 불안정하며, 노동 생산성은 떨어지는데, 파업과 분규가 심해져, 점점 더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간다고 내 어린 마음을 부추겼다.

전교조가 정식 출범하기 전, 86년도였다. 우리 학교 역사 선생님, 이전 학년 담임이기도 했던 이 분은 훤칠한 키에 거무잡잡한 피부, 걸죽한 경상도 사투리에, 한 손에는 교과서, 한 손에는 나이키 모양의 몽둥이를 갖고 다니시던 분이었다. 단체기합을 주면서, '자 이제 다 되었다…' 싶을 때쯤, 5분 더 주리를 트는 방법을 자주 쓰시던 분이셨다. 이 분이 국사 시간에 갑자기 종이를 한 장 펼치시면서, "교사 협의회" 라는 이름의 교원노조를 시작할 것을 선언하셨다.

무섭긴 하지만, 허튼 소리 하지 않으시는 저 국사 선생님이 교원노조 설립을 선언하셨다. 이것은 내 무지와 몰이해를 강하게 도전하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86년, 아시안 게임이 있었지? 우리는 때 아닌 "서머타임" 이라는 것을 맞이했다. 뉴스에서는 수 차례의 공청회를 거쳐서 도입하게 되었다고 나를 가르쳐 들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 도입하게 되었다는 제도란다. 우리나라가 예전에 미 군정 시절에 잠시 미국 따라 도입했던 제도였다는 역사적 친밀성을 높이려는 멘트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던 서머 타임은 88 올림픽을 하는 그 해를 끝으로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좋은 제도라면 계속 했어야지 왜 딱 3년만 했을까? 나중에 들었는데, 무려 미국의 황금 시간대에 올림픽 중계를 선사하려는 정부의 꼼수였다는 것이었다. 미국 방송사로부터 더 많은 중계료를 받는 조건으로 전국의 수험생들을 한 시간씩 시차 적응하게 만들어 준 고마운 우리 전두환 대통령 각하.

댓글 6

도미에님의 댓글

서머타임이 그런 이유였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전교조 시국도...저는 결성단계는 전혀 몰랐고 출범 이후 모교에 동문지원 투쟁을 나갔더랬어요. 그해 늦봄부터 여름 방학 전까지 거의 매주 학교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리바님에게 답글 미국님 호주머니에 있는 달러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우리 자존심에 쪼끔 더 도움이 되려나요?
제가 화가 났던 것은, 언론에서는 도입 당시 에너지 절약 효과가 있고 어쩌고를 강조했고, 또한 공청회 등을 통해 시민 의견을 수렴했다고 하는 등의 보도를 얼굴 색도 안 변하고 뻔뻔하게 뉴스에 보냈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89년도부터는 그 아무도 서머타임을 이야기하는 언론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관제 언론이었고, 시키는 대로 하는 보도라는 것을 자인한 꼴이었죠.
물론, 미국 방송사에서 돈을 더 받기 위해서 그렇다고 정부에서 실토를 할 수 는 없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다 잘 끝났으면 됐지 뭐? 라고 뭉쳐 버리고 말아야 하는가? 아무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국가적으로 한 시간을 당기면서도 그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우리 80년대는 전체주의 사회였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BonJovi님의 댓글

아. 아주 잠시 했었던 썸머타임의 기억이 나네요. 한 시간 빨리 가야한다고 짜증부리다가 8시에도 훤하게 해가 떠 있는 것을 보고, "호오.....?" 했던 기억이 납니다.

junja91님의 댓글의 댓글

@BonJovi님에게 답글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쓰다보니... 다시 찾아보니 87년도와 88년도, 2년간 실시한 것으로 나오는군요. 하긴, 86 아시안 게임에서 서머타임을 하고 득 볼 일은 없으니까요.
전체 1,353 / 3 페이지
전체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