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파업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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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파업의 추억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흔한 일은 아닐 것 같아서 써봅니다. (의외로 아닐수도?!)

(쓰다보니 길어져서 지치네요. 가독성 아몰랑~ ㅎㅎ) 


다까끼 마사오가 죽고,

제한된 정보를 통해 5.18시위대를 응원하고 잊고,

아버지께서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수도 있을거란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이 별일 없었고,

… 중략 …

여러 우여곡절(삶의 곡절 5번, 직업 3개)을 거치며,

공장 단지가 아닌 시골 구석에 박혀있는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뒤에 이어짐)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요약을 안할수가 없네요.

요약:

- 86 아시안 게임 개최를 진행한 전대갈이는 이걸로 궁민을 호도하려 했겠지만,

- 반대급부로 노동권리에 대한 인식도 커지고 있었다. (아니 나라가 이렇게나 잘 산다는데, 우리도 좀 같이 살자!)

- 주변에서 유행하던 파업 바람에 편승하여, 친하게 지내던 형이 파업을 하겠다기에 동참했다.

- 파업 초기에는 거의 모든 인원이 참여했으나,

- 몇일 지나자 사장의 개별 회유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빠졌다.

- 열흘 쯤 지나자 형들 몇명과 나만 남았다.

- 대장 형은 실패를 인정하고,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 나는 거부하고 집에 갔다.

- 대장 형은 끝까지 버텼던 사람들을 좀 멀리 떨어진 공장들에 하나둘씩 빠르게 이직시켰다.

휴~

요약도 기네요;;


==========

본문.

때는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니 개최하니 하던 때.

공장 단지가 아닌 시골 구석에 박혀있는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구성원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었고(단순 공정),

형들 열 댓명이 복잡한 작업, 신제품 선도 제작 및 석고 형틀 제작, 공정간 중계, 기타 잡일 등을 맡고 있었죠. (저도 살짝 발 담그고 있었)

독일인가에서 수입한 알록달록 유리들이 컨테이너에 실려서 오면,

재단부에서 재단하고, 재단된 유리 모서리를 갈고, 모서리에 동 테이프를 두르고, 스테인드 글라스 형태의 석고 형틀에 배열하고,

형틀에 배열된 것들을 커다란 전기 인두기(인두팁 지름이 거의 손가락 굵기)로 납땜하고, 전등 꼬다리를 납땜하고,

에칭기로 납 표면을 무광 검정으로 변색시키고, 세척, 건조 후 포장합니다.


저는 주로 인두질을 했죠.

가죽 앞치마를 하고 있지만, 진짜 닭똥같은 납이 흘러내리면 자지러질듯한 뜨거움은 물론이고,

간혹 그 두꺼운 가죽 앞치마와 청바지를 뚫고 들어와 살을 데이기도 합니다.

저는 괜찮았어요~

칼퇴가 중요한 아주머니들이 주축이라 긴 야근도 없었고(공장 정리/다음날 작업을 위해 우리 그룹은 1~2시간 야근)

퇴근 후 공부할 시간이 보장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고,

워낙에 웃음이 많은 성격이었고, 귀여워서(응?) 귀여움을 많이 받았고, …

현실에 빠르게 수긍(낙천적인건 아님)하는 편이었고, ...


근데 하루는 사장이 공장 옆에 지은 사택 대청소를 시키는 겁니다. (본래 집은 먼데 따로 있고)

휴일에 개인적인 일을 시키는 것도 기분이 나쁜데,

사택이 으리으리 한겁니다.

그야말로, 스테인드글라스가 어울릴 만한 집을 지어 놓았더군요.

이게 또 전시용은 아닌게, 완전 살림집이었거든요.

글차나도 급여가 다른데와 다를 바 없이 짠 상황에, 그 호화로운 삶을 목격하니,

기분이 확 상했습니다.


게다가, 재단부 직원들의 베타성과 특혜 등 (기숙사가 아예 따로 있는 등)

약간의 불만이 있기도 했죠.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여러 공정을 다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거의 모든 공정을 섭렵했지만, 재단부는 철벽이더군요.

(바뜨, 나중에 알고 보니 부서/공정간 인력 이동/기술 전수는 어디나 힘든거긴 하더군요)


그 때가 아시안 게임을 주최할꺼라고 난리였을 때였는데,

전대가리는 3S 정책으로 국민의 시선을 돌리는 목적이었고, 성공하기도 했지만,


다른 면으로는 들불처럼 노동자 권리 주장이 퍼저 나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온나라가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제 주변은 그랬어요)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도 그 바람이 찾아왔고,

몇몇 형들이 작당(?)을 하다가 저도 합류하고,

아주머니들을 살짝 만나서 이야기를 진행 한 후,

공장 점거, 파업에 돌입했죠.

요구사항은, 급여 15% 인상, 기숙사 개선, 사장의 사적인 일로 노동자 동원 금지 정도 였던 걸로 기억해요.


처음엔 순조로웠습니다(?).

거의 모든 공장인원이 참여해서 공장을 점거했거든요.

사장과 사무직, 재단부는 도망가고.

근데 문제는 사장이 코빼기도 안보이니, 이게 파업을 하는건지? 노는건지 모르겠는;;

그야말로 공장에서 밥해 먹으며 놀았습니다.

게다가 아주머니들은 점심 먹고, 저녁 해놓고 집에 가시고, 이게 뭐야?


한 3일 지났나?

아주머니들이 안 나오십니다.

형들이 수소문을 해보니, 사장이 아주머니들 따로 만나서 급여 5% 인상을 약속했다고 하더군요.


일단 그래도 우리에겐 열댓명이 남았으니(아주머니/재단부/사무직 제외 거의 전원).

공장에서 버팁니다.

중간에 동네 경찰 두명인가가 왔지만 대장형이 꺼지라며 뭐라 하니 갑니다.

그 후 몇일이 지나도 사장이고 뭐고 꼬빼기도 안보이고.

이제 그만 둬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장형은 좀 더 버티면 납품땜에라도 공장을 돌려야 하니 사장이 나타날거다.

몇몇은 경찰이 몰려오면 어쩔꺼냐?

그렇게 몇일 더 지나니, 대여섯명이 더 이상 못 하겠다며 빠집니다.


그렇게 몇일 더 지나고 보니, 5명인가 남았네요.

그때쯤 사장이 와서 대장형과 따로 이야기를 하고 간 후,

우리들에게 와서 말합니다.

우리도 이젠 끝인거 같다. 파업은 끝이다. 해고는 안하기로 약속 받았다.

내일 사장이 개별 면담을 진행할거다.

각자 요구사항 말하고 남아 있어라, 다른데 알아보고 이직시켜 줄테니까, 조용히 있어라.

개별면담에서 저는 기존 요구사항을 그대로 말했고, 사장은 8% 인상과 기숙사 개선, 사적인 일 시키지 않을 것을 약속하네요.

저는 못 받아 들이겠다. 그만 두겠다. 했고.

다음날 사무실에서 급여 정산을 해주더군요. 군말 없이 나왔고.

집에 가서 놀고 있었습니다.


몇일 지나니 대장형에게서 연락이 왔고,

좀 멀리 떨어진 공장에 소개를 시켜줬습니다.

다 같이 가는거 아니냐고 했더니, 여러명 받아줄 공장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라는 곳에 가서 잘 살았습니다.

끝까지 버텼던 형들과는 그 후로도 달에 한번은 만났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다 연락이 끊겼네요.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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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도미에님의 댓글

흑 일하기 싫은 차에 자바님 글 읽자기
재밌게도 쓰셔서 지남철에 쇳가루 붙듯이 빨려들어가 읽었습니다요~

책으로 배우기는 87년 6월이후 파업시대인 줄 알았더만 86년에 이미 그런 싹이 있었구만요.

경로당에 글 잘 쓰시는 분이 일케 많다니....

Java님의 댓글의 댓글

@도미에님에게 답글 저 글재주 엄써요.
그냥 있는 그대로 쓸 뿐이죠 ㅎ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가 좀 일찍이었더라고요.
대장 형도 위장(?) 취업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일한 경력자가 맞는 것 같고요.
그야말로 풀뿌리였죠. 그러나, 약한 풀뿌리.

결국 보도하지 않으면 없는 일이 되는 지금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한참 퇴보하고 있는거죠.

BonJovi님의 댓글

쟁의가 와해되는 순서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연대가 느슨하다기보다는 가장 아쉽고 절박한 쪽을 회유하는 방법을 쓰기에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빠르게 허물어지기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Java님의 댓글의 댓글

@BonJovi님에게 답글 그런거 같습니다.
노동운동이나 파업이 아니더라도 쟁의는 늘 있어왔고, 강자들은 억압의 방식을 전수해 왔지만,
약자들은 늘 새로운 경험으로 맞이 했기에 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노동권과 노동운동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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