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크, 우리도 땡크만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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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6.25발발 72주년입니다.
한민족 최악의 비극으로 온 국토가
피바다에 잠겼었죠.
반공교육 받으신 분들은 어릴 때
이맘때쯤 매번 TV에서 듣던 이야기가,
무시무시한 괴뢰군 땡크부대가 밀고내려왔고
우리 국군은 육탄용사들이 폭탄으로 장렬하게
산화했음에도 막기힘들었다는 내용이셨을 겁니다.
처음에는 소나기 같은 포격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우리 뇌리에는
38선을 밀고 내려오는 땡크 부대와
따발총이 괴뢰군의 상징으로
강렬하게 새겨져있죠.
(땡크는 지금의 연천역에서 내려서
거기서부터 출동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소련으로부터 받아 투입된
탱크 수는 250대 미만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당시 한국 전선으로선
상당한 수이긴 합니다.
그 당시 탱크가 우리 국군에겐 그만큼 생소했고
자주포와 혼동한 사례가 빈번할 정도였죠.
하지만 괴뢰군 땡크가
어릴 때 영상물과 나레이션의 충격적
이미지만큼 1~2000대가 들판을
횡대로 밀고 내려오진 않았습니다.
서부 전선이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부대가 길게 늘어선
경우도 많았고
보병과 합동 전술도 아직 미숙했다고 합니다.
정찰 미숙으로
선두탱크가 돈좌되면 우왕좌왕할
정도로 괴뢰군도 땡크 운용에
그리 능수능란하진 못했죠.
즉, 어느 정도 방어용 중화기만
준비되어있었다면 서울까지
3일만에 밀리지 않고 막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한반도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테지요.
당시 미국이 미군철수를 하면서 신생한국군에
중장비, 중화기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분석이 분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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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애치슨라인을 들며 한국과 대만은
포기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운운에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
-심한 군축으로 미군도 빈털털이였다,
-핵무기 때문에 재래식 대규모 전면전은
한물 갔다고 보았다.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여 김일성이
밀고내려올 6.25자체를 꿈에도 예상못했다.
등등 말은 많습니다만, 많은 역사의 실수가
그렇듯이 모호한 부분, 우연이 겹친 부분,
눈에 뻔히 보이는데 간과한 부분 등
복잡다단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시 2차대전 때 생산된
M4탱크가 4만대가 넘었고
(영화 퓨리에서 브래드피트가 몰던 땡크입니다)
105mm곡사포가 12000대 넘게 생산되었습니다.
아름다운 p51무스탕전투기도
무려 15000대 넘게 찍어냈죠.
스타급 무기만 이 정도니 그 아랫급 구형무기는
뭐 그 잉여수량이 더 엄청났을겁니다.
대규모 군축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폐기,재활용,보관할 무기를
신생 한국군에 방어용으로
주는 것은 크게 어렵거나 고비용이 드는 문제
또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부담을 주는
행위는 아니었을겁니다.
규모가 그리 크게 필요치 않았을거니까요.
고작 탱크 100대, 곡사포 200문, 무스탕 50대
정도면 방어용으로는 충분했겠지요.
(물론 군사무기라는게 보급, 유지보수,교육 등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지금 휴전선과 38선은 꽤 다릅니다만,
연천,포천,철원 등지에서 군생활 하신 분들은
느끼셨을겁니다.
일개 병졸이 봐도 높은 고지가 너무나 많고
그 사이 그리 많지 않은 회랑을
대부대를 몰고 지나오는게 진짜 어렵겠다,
산 위에 숨어있으면 때려잡기 좋겠다.
이런 느낌을요.
물론 일반인의 상상과 실제 군사작전은 전혀
다르겠습니다만,
100대의 미국 탱크로 잘 매복하고,
미리 타격지점을 준비한곡사포의 지원을 받았다면,
250대 미만의 괴뢰군 땡크 정도는 막거나
최소한 상당한 기일을 저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차대전 때 미국이 압도적 물량으로
생산한 그 많은 중화기들 중 적은 양이라도
우리 국군이 받아서 보유했더라면
역사가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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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06.2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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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06.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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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06.24 14:56
동네언덕님의 댓글의 댓글
세이투미님의 댓글
3세대 전차 2천대 넘게 비축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전차를 만들어 수출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을 푸세요
파키케팔로님의 댓글
(잉여 물자를 공여받았어도 당시 한국군이 그걸 제대로 운용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고요)
동네언덕님의 댓글의 댓글
심지어 한국군정보부도 1년 전부터 국지도발이 아닌 대규모 준동을 50년 봄으로 강력히 예상하지요.
심지어 6/10 전후로는 민간인 소개, 대규모병력 철도 이동 등으로 뭔가 심상치 않음이 명백히 감지되었고 보고되었는데도 경계태세를 낮추는 큰 실수를 범하지요.
니파님의 댓글
동네언덕님의 댓글의 댓글
기갑+곡사포+중화기 가 맞겠네요.
꼭 기갑,화포 의 과시가 아니더라도
당시 이미 개발되었던 무반동포(총)500기이상+대전차지뢰 10000 발만 규모만 있었더라면 초전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을거라고 생각되네요. 기갑,화포,항공기만 달랑 받았으면 운용이 당연히 힘들었겠고 군수지원, 훈련 등도 미군에게 지원받아야했겠죠. 다만 그 규모가
군축을 감행한 미군 입장에서도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을겁니다.
국군의 피교육자로서 자질로 말씀드리자면,당시 거의 폐선이던 백두산함을 근근히 가져와서 단기간에 운용숙달되어 적함을 대한해협에서 부족한 포탄으로도 격침시킨 사례를 보면 우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힙업님의 댓글
종심타격이나 포병지원을 최우선하는 것 등이 6.25 때 너무 허무하게 당해버려서 생긴, 적에 대한 사랑/모방... 같은 거라고 할까요.
동네언덕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데 서울 입성 이후 계획을 북한군이 짜느라 미숙한 점이 많았다죠.
호되게 당한 적의 전술이니 엄청나게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았을까요. ㅎㄷㄷ
inde님의 댓글
(짐작입니다만)
당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군 상층부의 썩을대로 썩은 부패상과
(무기 주면 북한이나 쏘련에 팔아먹고도 남을 놈들이 쌨었......)
입으로만이긴 하지만 틈만나면 북진통일과 전쟁을 선동하던 이승만의 주둥아리
등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동네언덕님의 댓글의 댓글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지정학적 전략 시각에서 미국이 아주 적은 (군사원조)비용으로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을 크나큰 세계대전 직전급 전쟁으로 비화시킨 데에는 아무래도 큰 실책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돌이켜보면 막을 기회가 있었죠.
hailote님의 댓글
막상 방어선 안에 있던 일본에도 전차가 없어서 급하게 가져온게 채피 경전차였고 탈탈 털렸어요.. 게다가 전차나 전투기등 중장비는 운용도 준다고 끝이 아니고 뭐 이승만의 툭하면 북진 개소리에.. 이런저런 이유가 많습니다.
대끼리님의 댓글
한반도 포기, 왜국하고 대만하고만 보호한다 였죠.
그게 젤 큰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