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톤치드 (172.♡.218.138)
2024년 3월 29일 PM 03:16
-- 토지공개념처럼, "의료공개념"도 필요하다 --
정권에 상관없이, 정부와 의사들간 대화가 언제나 전혀 진척이 안 되는 건 정확히 얘기하면 '의료사개념'과 '의료공개념'의 차이라고 봐야 한다. 의사들은 자기 돈으로 의원을 개원했고, 만약 망하면 그 빚을 자기 혼자 떠안고 패가망신한다. 반대로 잘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건 한국 의료가 근본적으론 '의료 사개념'의 시스템에 통합돼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이문에 밝든 그렇지 않든, 사업 수완이 좋든 아니든간에 의료는 공공적인 일이라 국가활동에 포함돼 있다면, 망하지도 않고 너무 많은 돈을 벌 일도 없게 만들어 놔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의료의 공공화에 예산(돈)을 쓰기 싫어하고 의사는 자기가 투자한 데 대해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이런 상황에서 하는 대화는 하나도 진척이 될 리 없다. ㅇㅅㅇ 정부 이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료는 일반적 상업행위와 동등화시킬 수가 없다. 국민건강과 직결돼 있고 복지적 차원에서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수 국민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인데 전기값이나 항만, 공항 이용료 등과 함께 의료서비스 가격도 국가가 통제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료 문제의 모든 원죄는 박정희가 군사독재정권답게 건강보험을 뒤에 있을 부작용 고려 않고 마구잡이로 밀어붙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첫째,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에 강제가입해야 하고 건보가 지정한 수가대로 돈을 받도록 했는데 이걸 순리대로 풀려면 의료기관의 공공성을 위해 국가나 지자체들의 재정이 들어가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병의원에 종사하는 의사, 의료인들 상당수가 공기업에 종사하는 (예컨대 한전이나 산업은행같은) 직원이나 혹은 준공무원처럼 흡수하면서 시행해야 했다.
근데 군사독재정권이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냥 막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루아침에 밀어붙인 것이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계속해서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응급실 뺑뺑이 필수의료 기피 서울지방 격차 이런 것들 모두가 박정희식 무지성 정책이 남긴 부작용, 부산물들이라 하겠다. 한국 의료 시스템이 세계 최고라느니 그따위 소리는 그냥 정권 홍보용 x소리일 뿐, 사실은 벼랑끝에 서서 곧 올 파국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건보가 지정한 수가대로만 진료하면 적자를 피할 수 없는 게 필수의료쪽이다. 이러니 병의원들은 앞다투어 비급여 항목들을 만들어서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필수의료는 비급여 항목을 들이밀 공간도 별로 없다. 그러니 의대생, 전공의들이 필수의료과를 기피하게 된 것이며 큰 병원들은 인건비를 줄이느라 전공의 수를 늘려서 적은 급여에 거의 24시간을 근무시키면서 저수가를 감당해 온 것이다. 14만명의 의사 중 1만명 남짓한 전공의들이 자리를 비웠다고 왜 의료대란이 생기느냐고 의문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때문이다.
사실 피부과나 영상의학과 임상병리과 이런 데 전공의들이 빠졌다고 뭐가 무너질 일은 없다. 경각에 달린 사람 목숨을 살리는 데 관계된 일은 거의 응급의학과 일반외과 흉부외과 소아과 산과같은 필수의료 분야인데 거기 일은 종합병원의 전공의들이 거의 다 하고 있다. 수가가 하도 낮으니 전문의들이 할 일까지 다 수련중인 의사들한테 때려 돌리기 때문이다.
지금 2천명 던져놓고 정부는 필수과 수가 인상해서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등신스러운 소리다. 필수의료 수가를 높이면 그 효과는 전부 서울의 빅5 병원들한테만 집중된다. 지금처럼 공공이 수가만 통제하고 의료의 이용은 시장경제식으로 맡겨놓는 시스템에서는 지방이나 중소병원들이 빅5와 경쟁이 될 수가 없으므로 수가를 높이는 만큼 더 더 더 쏠림만 가속화될 뿐이다. 결국 필수의료/지방의료 붕괴는 좋아지는 게 아니라 더 심해진다.
의료 개혁의 핵심은 의료의 공공성을 확고히 하는 데 있다. 지금 뭔가를 반드시 하겠다면, 해야 되는 건 수가도 증원도 아니라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시키는 일이다. 토지공개념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처럼 의료도 공개념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예컨대 xx동민들은 xx동사무소에서만 전입신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환자들을 자기 사는 지역의 특정 의원에 등록시키는 것도 필요하고 환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병원을 쇼핑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건 표를 얻는 일이 아니라 떨어져 나가는 일이다. 그럼에도 꼭 추진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아무도 안 해 왔다).
아무도 얘기 안 하고 있지만, 행위별 수가제도 점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 내시경이든 로봇수술이든 어떤 의료 행위 한 건 할 때마다 돈이 나가게 해 놓으면 의료계에선 계속 더 더 더 하게 만들려고 권하게 마련이고 곧 건보재정의 파탄으로 귀결된다. 극단적인 초노령화 사회에서 건보가 붕괴되지 않으려면, 국민들이 병의원 이용을 덜 하게 만들고 의사들은 진료를 더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만 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지금의 수가 시스템을 점차 바꿔나가야 하는 문제지, 수가 항목의 가격을 인상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코로나때 이미 그렇게 많이 나온 얘기지만 의료의 공공화라는 주제는 아직 첫 삽도 못 뜬 상태다. 근데 지금 정부는 쓸데없이 2천명 증원 사태를 일으켜 촛점을 흐리고 오히려 개혁을 후퇴시키고 있다. 의료 공개념의 확립, 여기에는 여당도 야당도 보수언론도 진보언론도 없다. 다 같이 달려들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함께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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