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옛 우리나라가 왜 망했나 보니

알림
|
X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제리아스 118.♡.12.190
작성일 2024.08.14 08:16
1,031 조회
2 추천
글쓰기

본문

역사에 대해 별 흥미가 없던지라


19세기에 조선이 나락간 이유가 그냥 정치가 엉망이었겠거니 했는데


근본원인은 저거였군요



아...과학의 조선었는데 


쩝...뭔가 기분이 묘하군요

댓글 17 / 1 페이지

푸른미르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푸른미르 (118.♡.74.150)
작성일 08.14 08:19
실은 이앙법 같은 영농기술 발달로 생산량은 증가 했지만
소위 삼정의 문란으로 효율적으로 분배되지 못했죠
삼정이 뭐 대단한게 아니라 세금이 제대로 안 걷혀서 문제가 됐던 거죠
가뜩이나 조선왕실은 청빈함을 강조하느라 세율도 낮았는데 세금 자체가 안 걷히니 국가 운영이 힘들었죠

트라팔가야님의 댓글

작성자 트라팔가야 (117.♡.2.217)
작성일 08.14 08:19
친일 사학자 이영훈 논리네요 ㄷ ㄷ ㄷ



비판논문 있어요.
이 글은 이영훈(2012)에 의해 추계된 水稻作생산성의 장기추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 를 대신하여 새로운 추계를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영훈은 兩班家와 그 親族집단이 남 긴 秋收記로부터 지대량 시계열 자료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1685~1945년간 수도작 토 지생산성의 장기 추이를 추계하는데 성공하였다(이영훈 2012). 그의 추계에 따르면, 미곡생 산성은 17세기말부터 하락을 거듭하다가 초기 시점대비 약 1/3 수준으로 떨어진 20세기 초 에 들어선 이후 비로소 하락을 멈추고 상승⦁반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수도작 생산성 의 장기 추이는 크게 보아 20세기 초를 저점으로 하는 U字 혹은 V字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훈(2012)은 이와 같은 장기 생산성 하락의 직접적 원인으로 산림의 황폐화(이우 연 2010)를 지목하였으며, 20세기 초의 생산성 반등은 1876년의 開港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 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리아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제리아스 (118.♡.12.190)
작성일 08.14 08:23
@트라팔가야님에게 답글 주장한 사람이 저모양이면 뭔가 믿으면 안될거 같긴합니다만. 생산량 부족이 나라가 흔들리는 원인이었다는 논리의 반박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군요

트라팔가야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트라팔가야 (117.♡.2.217)
작성일 08.14 08:27
@트라팔가야님에게 답글 “ 이러한 그의 추계를 둘러싸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다. 지대량은 생산성×지대율로 정의되는데, 그가 추계한 지대량 하락은 생산성의 하락 때문이 아니라 지 대율이 하락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김건태 2004: 267-271).”

자세한 것은 링크에요.
https://yeri.yonsei.ac.kr/yeri/reference/domestic.do?mode=download&articleNo=60736&attachNo=53904

제리아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제리아스 (118.♡.12.190)
작성일 08.14 08:45
@트라팔가야님에게 답글 해당 논문을 읽어보니 애초에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었군요.

정말 역사 훼손 관련 문제가 심각함을 느낍니다

육일사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육일사 (49.♡.160.66)
작성일 08.14 09:14
@제리아스님에게 답글 트라팔가야님 글의 마지막문단을 보면 개항이후 생산량이 증가한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도 개항이후 갑자기 생산량이 반등할 이유가 없죠.
그 시기는 각종 개혁, 민란과 의병이 불을 뿜던 격변기였는데요…

귀가부부부장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귀가부부부장 (39.♡.231.219)
작성일 08.14 10:44
@제리아스님에게 답글 이영훈 씨 논문은 읽을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서울대쪽 계량사학 및 경제사학 유물론적 사관이라고 떠들지만 실상은 통계를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 및 편집해 이용할 뿐이고 위에 적으셨듯이 기저의 주된 논리는 식민사학이죠. 2000년대 들어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서 이쪽 계열에도 지금은 논파가 많이 됐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느라 대학원생들이 많이 갈려나가긴 했습니다만 성과는 있었죠.

안녕클리앙님의 댓글

작성자 안녕클리앙 (106.♡.8.91)
작성일 08.14 08:28
역사에 관심 없다가 읽으신 글이 이영훈의 글이라니... 뭔가 뭔가 하군요

제리아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제리아스 (118.♡.12.190)
작성일 08.14 08:34
@안녕클리앙님에게 답글 그냥 검색했더니 말머리에 결과가 저랬죠. 저도 난감합니다

육일사님의 댓글

작성자 육일사 (49.♡.160.66)
작성일 08.14 08:31
전혀요.
오히려 조선후기 농업생산량은 늘었고, 북학파등이 중농중상하자고 하며 분위기 좋았지만
영정조 사후 윗분이 적었듯 삼정이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으로 늘어난 양반들이 신분상승비용 보전을 위해 수탈이 극에 달한게 컸죠.
그후 발생하는 문제에 청나라를 참전시킨 민비가 원조 국썅이 됩니다.

제리아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제리아스 (118.♡.12.190)
작성일 08.14 08:39
@육일사님에게 답글 이게 제가 나이브 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랑 큰 차가 없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심심하니님의 댓글

작성자 심심하니 (140.♡.29.2)
작성일 08.14 09:03
원래 사회나 조직이 아래부터 썩는 일은 절대 없다. 반드시 위부터 썩는 법이다. 역사상 한 번의 예외도 없을 정도로, 인간사회에서 보기 드문 법칙성이었다.외전 1권 P. 75

오렌지스콘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오렌지스콘 (106.♡.142.129)
작성일 08.14 19:43
@심심하니님에게 답글 어떤 책인가요?? 읽고싶습니다!

심심하니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심심하니 (121.♡.157.194)
작성일 08.14 22:01
@오렌지스콘님에게 답글 은하영웅전설입니다.

두냥아빠님의 댓글

작성자 두냥아빠 (49.♡.138.231)
작성일 08.14 09:52
구한말 경제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청일전쟁입니다.

"일단 조선 정부의 세입은 생각보다 꽤나 커지던 시기였음. 인플레이션 정책이 중단되고 법정통화를 만들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1892~93년 사이에 있었던 것과, 이미 90년도부터 해외로부터 진 차관이나 빚을 죄다 갚아나가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음.

아무래도 방곡령을 통한 세수 확대와 점차 안정되어 가는 해관세 체제, 그리고 서해 일대의 교역망이 매우 활성화되어 가면서 세입이 늘지 않을 수가 없는 구조였고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조선 정부의 세입원을 1년 800만 엔 가량으로 추산하였음.

실제 세액은 500만엔 규모지만 조선 정부의 세입이 주로 쌀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감안하였을 때 800만엔으로 추산한 것. 이 뿐만이 아니라 주요 항구에서 거둬들이는 해관세도 매우 안정적이었음.

1893년 기준 제물포 해관세가 120만 피아스트를 기록하였고, 원산의 경우는 정확한 해관세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93년 수출액이 168만 피아스트를 기록한 것을 보면 분명 적지 않은 해관세가 조선 정부의 주요 세입원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보아도 좋음.

그러다보니 89년부터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여러가지 개화 정책 및 군비 증강 정책이 시도된 것이고, 다량의 군수물자들이 이 때 도입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짐. 90년에만 개틀링 25문을 현금주고 구매해왔으니 말임. 86년에는 16번이나 환전하면서까지 별 똥꼬쇼를 다해가면서 6문 겨우 구매한 것과는 천지차이.

평양부의 경우 1893년 기준 수출액이 50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해지고 있었음. 이건 조선의 농업 사정과도 연결이 되는데 89년부터 풍년이 이어진 여파이기도 함."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44211198

1피아스트는 순은 약 24.3g 정도인 것 같습니다.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423

Vforvendetta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Vforvendetta (220.♡.72.1)
작성일 08.14 11:08
고부군수 조병갑이처럼  전국각지에서 백성들 수탈하고 고종과 민비는 안에서부터 썩어가니 망하는게 당연합니다
만약 동학운동이 성공해서 한양점령하고 고종의 목을 쳤으면 어찌됐을까 상상도 합니다

제리아스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제리아스 (118.♡.12.190)
작성일 08.14 11:26
@Vforvendetta님에게 답글 드라마에서 동학운동때 일본군이 미개인이라며 농민들 학살하던 장면이 떠올라 분노가 치밉니다.
글쓰기
전체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