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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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Orangesky 172.♡.95.47
작성일 2024.09.0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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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

September 1, 1939


by W. H. 오든(1907-1973)


비굴하고 부정직한 시대

간교한 희망이 꺼져갈 때

나는 의심과 불안에 싸여

52번가의 싸구려 술집에

앉아 있다.

우리의 삶을 속속들이 사로잡으며

분노와 공포의 물결이

밤낮 없이

온 세상을 휘감는다.

형언할 길 없는 죽음의 냄새는

9월의 밤을 범한다.


엄정한 학문이라면

파헤칠 수 있으리.

루터 이래 지금까지

문명을 광기로 몰아간 인간의 모든 죄과를,

린츠에서 일어났던 일을,

어떤 거대한 자기도취의 이마고가

정신병 앓는 신을 만들어 냈는지를.

우리는 안다,

학생들이 하나같이 무엇을 배우는지,

악의 피해를 본 사람들이

악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망명객 투키디데스는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 운운하는

뻔한 연설을,

독재자들이 하는 짓을,

그들이 무심한 무덤에 대고 말하는

노회(老獪)한 헛소리를.

그는 모든 것을 책에서 파헤쳤다,

쫓겨난 이성과

고통이 아예 습관처럼 굳어지는 것을,

과오와 비탄을.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


눈 먼 마천루가

인간의 힘을 뽐내기 위해

잔뜩 키 자랑을 하는

이 무심한 허공 속으로

모든 나라는 헛된 구실을

경쟁적으로 퍼붓는다.

번지르르한 꿈속에서

그 누가 오래 살 수 있으리.

제국주의의 얼굴과

세상에 횡행하는 죄과는

거울 속에서 노려본다.


일상에 매달리는

술 마시는 얼굴들,

불빛이 꺼져선 안 되고,

음악이 끊어져서도 안 되며

모든 관습은 공모하여

요새(要塞)와도 같은 이 술집을

집안의 가구처럼 친근하게 만든다.

결코 행복하거나 착하지 않은,

밤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처럼

유령의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행여 우리의 위치를 알게 될까봐.


요인들이 외쳐대는

도발적 헛소리보다

우리들의 희망이 더욱 조야하다.

광기에 찬 니진스키가

쟈길레프에 대해 쓴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마음,

모든 남녀의

뼛속에서 자라난 잘못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고,

널리 사랑하기보다

홀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어둠 속에서 몸 사리다

점잔 빼는 일상으로

빽빽하게 무리지어 나오는 통근자들,

"아내를 배반치 않으리라,

일에 더욱 힘을 쏟으리라,"

아침 맹세를 되풀이하고,

잠에서 깨어난 구제불능의 통치자

다시 정치놀음을 시작하니 -

누가 이들을 해방시키며,

누가 귀머거리에게 말해 줄 수 있고,

누가 벙어리를 대변할 수 있는가?


쾌락을 쫓는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낭만적인 거짓말,

하늘을 더듬는 마천루를 짓는

당국의 거짓말,

내가 가진 것은

중첩한 거짓말을 폭로할 목소리뿐.

국가란 없다,

그렇다고 홀로 존재할 수도 없다.

배고프면 시민이고 경찰이고

별 수가 없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


세상은 마비되어

무방비 상태로 어둠 속에 누워있다.

그러나 도처에 보이나니

정의로운 자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비판의 불빛이 섬광처럼 나타난다.

그들처럼

애욕과 흙으로 빚어진 내가,

똑같은 부정과 절망으로

에워싸인 내가,

긍정의 불길을 뿜게 하소서.


-W. H. 오든, "아킬레스의 방패", 봉준수 편역, 나남(2009), 90-101.

댓글 1 / 1 페이지

요시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요시 (1.♡.118.36)
작성일 09.01 18:26
저런 슬픈 글이
멋지게 다가오는 현 시대가
참 울적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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