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탄생, 아옌데의 죽음, 칠레 민주주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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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미국은 대단한 나라네요.
내용은 조금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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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히켈 <격차> 중에서
서구의 지배층이 케인스주의의 부상으로 자신들의 이익이 훼손되고 있다는 느낀 것은 해외에서만이 아니었다. 서구 안에서도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확산되면서 성장률이 높아지고 빈곤이 줄었으며 사회적 후생이 증가하는 등의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그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도금 시대Gilded Age와 '광란의 20년대'에 너무나 크게 이득을 얻었던 지배층은 케인스주의적 정책이 도입되면서 상당한 금전적 타격을 입었다. 미국 국민소득 중 상위 1%가 가져가는 몫이 절반으로 줄어 8%가 되었다. 상위 0.1%가 가져가는 몫은 더 극적으로 줄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에 도달했다.
한 가지 이유는 상류층에게 부과된 조세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의 최고한계세율은 90%에 달했다(오늘날 흔히 정치인들은 높은 조세가 경제를 둔화시킨다고 하지만 과거 데이터를 보면 미국에서 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는 최고한계세율이 90%인 시기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노조를 통해) 이윤을 더 공정하게 나누자고 협상할 수 있게 되면서 노동자들이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된 것도 국민소득 중 상류층이 가져가는 몫이 감소하는 데 일조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의 노조 가입률은 약 35%로, 이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세금이 오르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져서 부가 잠식된 지배층은 절박하게 해법을 구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에게서 해법을 발견했다. 미국 경제학자인 프리드먼은 동유럽계 이주민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뉴저지주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사용하는 직물 공장을 운영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노조 규제 등 수익을 갉아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프리드먼도 자라면서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고, 1930년대 이래로 내내 뉴딜 철폐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그는 가격 고정과 임금 고정 조치를 비판했다. 그에게 주된 영감을 준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로 런던정경대학에 있던 하이에크였다. 1944년 저서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개입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 파시스트 국가 독일이나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견해에 호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케인스주의자였고, 대공황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던 사람들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위험한 시절로 돌아간다는 아이디어에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는 언젠가는 세를 얻으리라 기대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계속 설파했다. 1947년에는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을 모아 몽페를랭 소사이어티를 결성했다. 이는 모임이 처음 열린 스위스의 휴양 도시 이름을 딴 것으로, 최대한 빠르고 긴급하게 대중 담론에 자유시장주의적 개념들을 밀어 넣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50년에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둘 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 있었으며, 시카고 대학은 곧 경제학에서 자유주의를 부흥시키는 허브가 된다. 학과자으로서 프리드먼은 자신의 사상을 운동가적 열정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순수한 시장이라는 비전을 전적으로 믿었고 경제가(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전의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위적인 왜곡이 없어지면 시장이 자체의 작동 원리에 따라 부드럽고 완벽하게 기능해서 부와 재화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분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이 유토피아적 완벽성을 추구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고 논리적인 경제 모델에 따라 돌아가는 우주,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할 때 모두를 위한 최대의 이익이 달성되는 우주 말이다. 프리드먼이 볼 때 높은 인플레나 실업 같으경제적 문제는 시장이 전적으로 자유롭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였고 따라서 인공적인 개입은 모두 제거되야 했다.
프리드먼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시장이 경제의 자연법칙을 따를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중의 상상 속에서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강하게 연동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시장에서 우리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했고 이것이 바로 민주적 참여의 본질이었다. 이 견해는 그의 1962년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의 기초가 되었다. 프리드먼 버전의 자유는 케인스주의적 개념에서의 자유와 충돌했다. 후자의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자유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였고 이를 달성하려면 지배층의 축적을 제한해야 했다. 하지만 프리드먼과 하이에크가 보기에 이런 제한은 [자유롭게 풀려 있을 때 더욱] 아름다웠을 시스템을 훼손하고 자유의 가능성을 침식하는 악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론은 너무나 우아하고 유려해서 호소력이 있었다.
프리드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미국의 케인스주의만이 아니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글로벌 남부의 발전주의도 적이었다. 프리드먼은 이 모두가 자본주의의 오염된 형태라고 보았고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격 통제는 기본적인 재화의 가격을 더 많은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최저 임금제는 노동자를 착취로부터 보호했다. 교육과 의료 같은 공공 서비스는 모든 이의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시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러한 정책이 시장 균형을 교란해 숨겨진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가격 통제, 보조금, 최저 임금제는 철폐되어야 했다. 교육, 의료, 연금, 국립공원 등 모든 정부 서비스와 공기업은 이윤 논리에 따라 운영되도록 민간에 매각되어야 했다. 노동 시장을 교란하지 않기 위해 정부는 사회적 지출을 줄여야 했다. 세율은 누진적이면 안 되었다. 기업은 자신들의 제품을 세계 어디에서든 팔 수 있어야 했다. 프리드먼은 이런 정책들이 적용되면 전례 없는 성장과 번영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경제 이데올로기는 곧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신新'이 붙은 이유는 대공황 이후 사라졌던 고전 시장 자유주의를 되살렸다는 의미에서였지만, 정말로 새로운 요소들도 있었다. 우선 시장 자유의 개염이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 등치되었다. 이것은 전에 없었던 새로운 면이었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독특한 특징이었으며 서구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정치적 의제를 추구할 때 중립성을 표방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보조금, 노동자 보호, 노조를 지원하는 규제에는 명시적으로 반대했고, 그와 동시에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보조금과 보호, 그리고 거대 기업을 지원하는 규제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 개념들은 기업 세계와 상류층에서 지지를 얻었다. 이들은 프리드먼을 비롯해 '시카고학파'의 형태로 나타난 나팔수 학자들의 등장에 환호했다. 자신들의 경제 어젠다에 정당성의 휘광을 둘러주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시카고학파에 기업의 후원이 쇄도했다. 유일한 문제는, 일반 시민들이 이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케인스주의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 이론을 해외에서 먼저 실험해보는 것은 가능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은 칠레를 특히 우려했다. 칠레는 유엔의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 경제위원회'와 라울 프레비시 같은 학자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라틴아메리카 발전주의 사상의 중심지였다. 미국은 발전주의 사상이 칠레를 넘어 중남미 대륙의 다른 지역에까지 퍼질 것을 걱정했다.
그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1956년에 칠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목적은 칠레 경제학자들(약 100명)을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훈련시켜 발전주의에 맞서게 하는 것이었다. 10년 뒤 이 프로그램은 라틴아메리가 전체로 확대되었고 시카고 대학에는 '중남미 및 카리브해 연안 경제 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사회 안전망, 무역 장벽, 유치산업 보호, 가격 통제, 공공 서비스 등 당시에 진보적인 라틴아메리카 경제학자들이 촉진하고 있던 정책들을 일축할 새로운 경제학자들을 훈련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칠레의 장관이던 후안 가브리엘 발데스는 이 작전을 "미국이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에 이데올로기를 체계적으로 이식하기 위해 진행한 놀라운 사례"라고 묘사했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젝트는 예전에 트루먼이 시작한 '포인트 포'의 기치하에 고안되었고 미 국제협력국(나중에 미 국제개발처가 된다)이 수행했으며 자금은 포드 재단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이것은 미국이 공식적으로 진행한 첫 '국제개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미 국제개발처나 포드 재단 같은 기관이 수백만 달러를 부었음에도 이 기획은 영 성공적이지 못했다. 발전주의는 계속해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속도를 얻고 있었고 많은 유권자들이 더 많은 국가주의, 토지 개혁, 그리고 글로벌 남부 국가들 사이의 협업을 요구하고 있었다.
칠레보다 이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칠레에서 발전주의는 유권자들이 살바도르 아옌데를 선출하면서 추동력을 얻었다. 굵은 테 안경에 사려 깊고 겸손한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진보적인 견해로 인기가 많았다. 당시 칠레는 인구 중 다수가 여전히 극빈곤 상태인 반면 소수의 지배층은 방대한 토지와 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더 나은 임금, 더 나은 공립 학교와 의료와 주거, 더 정당한 임대료 등 더 공정한 사회를 약속하며 권력을 얻었다. CIA와 미국 기업들이 아옌데의 우파 쪽 경쟁자 호르헤 알레산드리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를 조작하려 했음을 생각하면, 아옌데의 승리는 실로 놀라운 성취였다.
아옌데 정부는 약속을 이행했다. 최저 임금제를 도입했고, 빵 가격을 낮추었으며,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실시했고, 저소득층 주거를 확대했고, 노동자 계급 동네에 대중교통을 확대했다. 또한 구리 광산을 국유화했고 토지 소유에 80헥타르의 상한을 두었다(그 이상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민간 소유자에게 완전하게 보상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대장원을 없애고 토지를 소농민에게 재분배했다.
이 조치들은 효과가 있었다. 임금이 올랐고 빈곤율이 떨어졌고 취학률은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것이 마뜩하지 않았다. 아옌데의 국유화와 토지 개혁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위협으로 보였다. 미국 기업들은 칠레에 9억 6400만 달러를 투자한 상태였고 평균적으로 17.4%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아옌데는 투자 자산을 잃은 사람 모두에게 완전한 보상을 약속했지만, 이것으로는 미국을 달랠 수 없었다. 미국은 아옌데의 인기가 높아지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까지 좌파적 전환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는 미국 해외 투자의 20%를 차지하고 있었고 미국 기업은 라틴아메리카에서 5436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주 많았고, 칠레의 이웃 국가들 중에서 아옌데 스타일의 정부가 더 생겨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군사적 압력을 써서, 즉 칠레 경제의 목을 조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옌데가 국가주의적 프로그램을 철회하게 만들려고 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에게 "경제가 비명을 지르게 하라"고 지시한 것은 유명하다. 미국은 칠레로 가는 정부 대출을 막았고 민간 은행들도 칠레에 대출을 중단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칠레산 구리에 대해 6개월간 수입 중지를 선언해 칠레의 외환 보유고를 고갈시켰다. CIA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 ITT가 소유한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를 활용해 반反아옌데 프로파간다도 퍼트렸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1973년에도 아옌데는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고, 오히려 이전 3년 사이에 아옌데의 정당은 지지율이 더 높아져 있었다. 미국은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과테말라와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했던 전술, 즉 오랜 옛 친구인 쿠데타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1972년 9월 11일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CIA가 주도한 '퓨벨트 작전Operation FUBELT'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CIA가 주문한 영국제 폭격기가 산티아고의 상공을 낮게 날더니 대통령궁에 미사일과 포를 퍼부었다. 지붕과 벽이 날아가고 기둥에서 먼지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칠레 국민들의 희망은 이렇게 끝났다. 숨지기 몇 분 전에 아옌데는 전국에 방송된 마지막 연설을 했다 "제 이야기에 억울함은 없겠지만 실망스러움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저는 제 생명으로 국민에게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저는 수많은 칠레인들이 선한 양심으로 심은 씨앗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나라의 노동자 여러분. 정의를 향한 커다란 열망에 대해 통역자에 불과했던 한 사람에게 보여주신 신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배신자가 승리하는 쓰디쓴 순간에도 또 다른 사람들이 이 어둠과 고통의 순간을 극복해낼 것입니다."
그가 쏟은 모든 노력의 결과, 아옌데는 머리에 크게 손상을 입은 채 집무실의 붉은 소파에 쓰러져 사망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안경은 부서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리처드 닉슨은 5000마일 떨어진 곳의 비슷하게 생긴 집무실에서 승인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피노체트의 권력 장악은 신속하고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대통령궁 폭발이 있고서 피노체느는 아옌데의 사상을 지지하던 8~10만 명을 체포해 수감했다. 대부분은 소농민이거나 노동자였다. 3200명이 실종되거나 처형되었다. 정권 초기에 많은 이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바뀐 스포츠 경기장에서 처형되었고 20만 명이 국외로 도피해 정치적 망명자가 되었다.
칠레에서의 쿠데타는 그보다 이른 시기에 미국의 지원으로 자행된 쿠데타들과 스타일이 비슷했지만 매우 중요한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단순히 미국 기업에 친화적인 지도자를 심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책을 자유시장 원칙에 따라 완전히 개조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경제 기조는 모든 반대 세력이 분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오로지 그랬기 대문에 가능했다. 1975년에 미국 상원의 한 위원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CIA의 협력자들이 초창기에 전반적인 경제 계획에 관여했고, 이것이 칠레 독재자[피노체트]의 핵심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에 기초가 되었다." CIA가 자금을 댄 칠레 경제학자 집단(시카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서 '시카고 보이즈'라고 불린다)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프리드먼이 개진한 처방을 실행하기 위해 피노체트 정권에 경제 자문을 제공했다. 프리드먼 본인도 피노체트 정권의 핵심 자문이었다.
프리드먼이 칠레에서 한 실험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쿠데타 직후부터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시작되어 높게는 인플레율이 341%에 달했다. 시카고 보이즈가 인플레를 꺽기 위해 통화 공급을 줄이자 불황이 왔고 실업율이 9% 가까이로 올라갔다(아옌데 시절 3%). 이후 몇 년 동안 칠레에서 거의 500개의 국영 기업이 민영화 대상에 올랐다. 여기에는 은행도 있었고, 공립 학교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사회보장 시스템도 민영화되었다. 또 시카고 보이즈가 관세 장벽을 없애면서, 쿠데타를 지원했던 제조업마저 값싼 수입품이 낮은 가격으로 치고 들어온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보조금과 가격 통제가 없어지자 생활비가 급등했고 사회 서비스 지출은 반으로 줄었다. 그러는 동안 군에 들어가는 지출은 증가했다. <이코노미스트>마저 이것을 "자해의 잔치"라고 불렀을 정도다.
1978년 이후에 경제가 약간 회복되긴 했지만 이는 해외에서 투기적 금융 자본이 들어와서 떠받친 회복이었고 1982년이 되자 경제는 또다시 심각하게 붕괴했다. 하이퍼인플레가 다시 시작되었고 실업률은 35%에 달했다. 점차 상황은 피노체트가 시카고 보이즈 상당수를 해고하고, 민영화되었던 기업과 은행 다수를 다시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경제가 완전한 붕괴로 치닫지 않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은 민영화되지 않은 국영 구리 광산 기업 코델코가 국가 수입의 85%를 대어준 것이었다. 1988년에 경제가 회복되고서야 프리드먼과 시카고 보이즈는 실험의 성공을 선포할 수 있겠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성공이었는가? 빈곤율은 41%였다. 평균 임금은 14% 낮아졌다. 최저 임금의 실질 가치는 42%나 낮아졌다. 기아가 만연했고 가장 가난한 40%의 식품 섭취는 하루 2000칼로리에서 1600칼로리 떨어졌다. 심지어는 1993년까지도 1인당 GDP가 쿠데타 이전 수준보다 12%나 낮았다. 피노체트 시절의 새 경제 체제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지배층뿐이었다. 은행과 외국인 투자자 들은 규제로부터 '해방'되어 호시절을 맞았다. 가장 부유한 10%가 국민 소득 중에 차지하는 비중은 28%나 증가했다. 칠레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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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화를 가장하고 있는 세계지만 진실은 정신줄 놓으면 그냥 노예가 되는 세상입니다.
이적님의 댓글
인위적인 개입이 없어진다고 '자연적'으로 바르게 돌아갈리가요.ㅎ
은비령님의 댓글
과거엔 영국이 그랬다지만 현대사를 보면 미국도 영국 못지 않게 더럽고 추악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강대국이라서 그런지 추악한 진실은 가려지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죠.
뚜두리님의 댓글
아주 구체적으로 알게 된거 같아요
한편 예전에 도서관에서 무료상영해줬던
산디에고에 비가 내린다 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미국이 단순 개입이 아니라 배후군요
보따람님의 댓글
우리는 이런자들의 복지를 진실한 사회복지라 생각하고 있고요.
TheBirdofHermes님의 댓글
케인즈주의-정부의 시장 개입으로 중재자 역할
하이에크 및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시장 만능주의(자유방임주의 및 정부의 간섭 일체 최소화) > 우리나라 기준 재정지출 최소화> 재벌 감세 및 종부세 완화로 인해 살림살이 빠듯해짐 > 인플레이션 유발 > 투명한 유리지갑 월급쟁이들 가처분 소득 하락 > 내수 부진 그리고 현재 알짜배기 땅들 기재부가 민각에 매각예정, 한전도 사장이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민영화 시동 검.
민영화 거부감 큼 > 지분 매각 또는 효율화 > 현재는 개혁 또는 카르텔이라 쓰고 민영화 토대 마련
그리고 신자유주의 주의는 지대추구를 목적으로 하는게 포잊트죠.
동동동대문을열어라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