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용 독서가 과자상자 될 뻔한 '조선어학회의 1927년 월간지'를 구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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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2024.10.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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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상자 될 뻔한 '조선어학회의 1927년 월간지'


작성자 김정호 원글보기

"

지난 6월, 울산대학교 측이 중앙도서관의 장서를 대량 폐기하기로 함.


도서관법 시행령은 모든 대학이 매년 일정량(소장 도서 7% 이내)을 폐기하도록 함. 울산대도 시행령에 따라 매년 1~2만 권 정도의 낡은 도서를 폐기해 옴.

그런데 이번에는 학교 당국이 소장 도서 92만 권의 절반인 45만 권을 폐기할 계획을 세움.
소문을 듣고 인문대 교수 몇 명이 설마 하며 학교 측에 문의했더니 실제 그럴 계획이라는 답변이 돌아옴.
명분은 ‘미래형 도서관’ 구축을 위해 디지털 열람실을 신설하고, 노트북 존, 카페 등을 만들어 학습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이었음.
학생들이 종이책을 거의 빌려보지 않는데 자리만 차지하는 종이책은 폐기하고 서가는 철거해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겠다는 것.

문의한 교수들은 일단 반대 의사를 밝힘. 그런데도 폐기 도서 목록과 선정 기준을 명기한 엑셀 파일이 첨부된 도서관장 명의의 공문이 날아옴.

문제는 폐기 도서 선정 기준이었음. 어이없게도 ‘대출 실적’. ‘대출하지 않는 책=소장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발상이었음.

2010년까지 등록된 동양서(국내서 포함) 중 무대출인 도서, 2005년까지 등록된 서양서 중 무대출인 도서가 폐기 대상이 됨.
지금까지 한 번도 대출되지 않은 책은 앞으로도 대출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이 도서관 측의 판단. 해당 도서를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 필요한 사람은 가서 대출받으면 되지 않겠냐고 함.
공공 도서관에 있고, 디지털화한 전자책이 있다면 굳이 실물 도서를 비용을 들여가며 계속 소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음. 일리가 있는 발상임.

반대하는 교수들은 “대출 횟수나 디지털 대체 여부 등 기능 중심의 폐기 기준“에 크게 반발. 선별은 ’책의 가치‘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

도서관 측이 폐기하겠다고 추린 도서 중, 특정 영역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총류’에 속하는 책이 무려 3만8,282권. 교수 몇 명이 목록을 꼼꼼히 검토하다가 깜놀함.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전에 출간된 “문화재급” 책 1,500여 권이 포함되어 있었음.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잡지 <조선(朝鮮)> 50여권(1920~1940), 영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찰스 매케이가 쓴 <대중의 미망과 광기>는 1841년에 첫 출간되었는데 1852년 출판본도 발견됨. 사료적 가치도 있는 고서들을 대출하는 학생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다 내다 버리려고 했던 것임.

그런 현실을 알리고 시급히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경희 국문과 교수가 전체 교원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냄.
교수 대부분이 문제의식에는 공감했으나 '디지털 문서가 있는데 왜 굳이 종이책을 남겨야 하냐'는 질문을 마주하고 묘한 온도 차를 보임.

책의 '물성'보다 정보가 중요한 자연대나 공대 쪽의 반응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음. 같은 인문대학 안에서도 '문.사.철' 전공에 비해 일반 어학 전공 교수들의 관심은 덜 했음.

인문대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반대 논거를 세우고 구체적인 대안도 마련함.

폐기가 불가피하더라도 '학생 1인당 70권'(대학도서관진흥법 시행령 제6조) 수준을 유지할 것을 요구. 울산대의 경우 75만 권은 유지해야 해서 폐기 도서 수량을 대폭 줄일 근거가 됨.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꼭 확충해야 한다면 본관 1개 층(25만 권 분량)만이라도 서고로 확보해야 한다고 강력 요구.

울산대 총장은 인문대 학장과 도서관장 양측의 의견을 모두 청취하고 폐기 일정을 보류함. 그리고 단과대별로 폐기 목록을 재정비할 것을 지시.

이제 모든 교수에게 버릴 책과 보관해야 할 책을 꼼꼼히 분류할 과제가 주어짐. 원 폐기 목록에 들어간 책이 대부분 인문 도서라 6명의 인문대 교수는 여름방학을 반납하고 완전히 노가다 작업을 함. 폐기 목록에 있는 책이 45만 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음.

"목록에 있는 책 제목과 서지정보만으로 책의 생사를 결정"하면 안 되었기에 한 권 한 권 '책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음.

버려지는 책더미에서 귀중한 책들을 가려내 보존하는 시스템이 미비한 한국에서 책의 운명은 개별 대학의 인문학 역량과 직결됨.

책의 학문별 위상에 따라 '구조 목록'도 달라짐. 예를 들어 사전은 '정보'가 우선인 쪽에선 최신판만 있어도 되지만 문헌학 연구자 입장에선 판본별로 있어야 함. 웹소설의 경우 굳이 실물 책을 보관할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소설 전공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자료임.

어떤 책이 '불필요'한지, 불필요하다면 대신할 책이 있는지, 대체 도서는 또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할 때마다 지적 도전에 직면.

'책 구조작업'을 주도한 인문대 교수들은 '구조가 기본값'이라는 원칙을 세움. 일단 다 보관하는 것을 디폴트로 하고 폐기할 책을 조금씩 찾아가는 방식을 취함. 선별자들 사이에서 남겨야 한다, 폐기해야 한다, 견해가 충돌하면 남기는 쪽으로 의견을 모음.

뜨거운 올여름 내내 울산대 도서관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구조하려는 선별 교수들의 열정으로 더욱 뜨거웠음.
8월 중순이 되어 인문대 부학장이 단과대별로 보존 희망 도서 목록을 취합해 학교 측에 제출함. 최초 폐기 대상 도서의 57.5%에 해당하는 25만9,917권이었음.

학교 당국은 살려야 하는 도서 수량이 너무 많다면서 15만 권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함. 2차 선별 작업에 들어간 교수들은 17만5,294권은 보존해야 한다며 최종 목록을 제시함. 15만 권에 맞출 것을 요구했던 학교 당국도 양보해서 이 수량을 받아들이기로 함.

4개월 간의 '구조 노력' 끝에 애초 사망 선고를 받은 책의 38.8%를 건져냄. 폐지가 될 뻔했던 10권 중 4권을 구한 것임.

울산대 경우는 내부 구성원들이 반발 > 협상 > 논쟁 > 재선별 과정을 거치며 합의점을 찾은 매우 드문 사례임.

대부분의 대학은 소리 소문 없이 그냥 소장 도서를 폐기하고 있음. 도서관에 공간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매년 막대한 수량의 도서가 사라짐. 2021년 164만2,845권(391개교)→ 2022년 205만3,490권(387개교)→ 2023년 248만2,496권(385개교), 최근 3년간 대학 장서 폐기 현황임.

종이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고, 대학 재학생들에게 종이책의 효용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엄연한 현실임.
따라서 '책을 줄이더라도 이용자가 찾는 도서관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용해도 본래의 정체성을 잃는 순간 도서관은 자멸할 것'이란 주장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함.

울산대 사례가 입증하듯
  • 소장 도서의 가치를 평가하고 보존 여부를 판단할 전문 인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 도서관에서 책을 추방한 ‘미래형 도서관’이 추구하는 미래가 무엇인가,
  • 대학 도서관에서 퇴출된 책을 시민사회가 활용할 방법은 없는가 등등,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

***
올해 1월에 클리앙에서 한 번 공유했던 울산대 옥재문고 얘기군요. <장서구하기와 과거의 기록, 미래 도서관에 대한 고민>이 

노경희 울산대 인문대 교수의 글에도 녹아있습니다.


단순히 책 대출건수가 기준이라면, 역사적으로 귀중한 가치가 있는 고서나 기록물은 다 폐기되겠죠.

또 어렵지만 학술적으로 인문학적으로 등 가치가 있는 전문 서적도 마찬가지고요.


얼마전에 <"책을 한 권 구매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한권 대출했다가 반납하는 것이 "한국의 국가 경쟁력"과도 연관된다 >는 커뮤글을 읽었습니다.

울산대 사례를 보면 공공도서관 폐기 기준도 <대출실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출판업계에서도 책의 판매를 위해

책은 <인테리어/과시용 독서/사 두는 것만으로도>도움이 된다고 홍보하더라고요.


이런 저런 글을 보다보니,맞는 말 같습니다. 

지구환경을 위해 전자책으로 구매를 하는게 더 좋을수도 있고요.


출판사가 희귀서적을 낼 수 있도록 독려하는게,

어쩌면 과시용으로라도, 혹은 다 읽지는 않아도

보존 가치가 있는 책을 구매하거나 대출하는게

전체 도서시장(출판, 공공/초중고대학 도서관, 독자층이 접할 수 있는 출판물의 다양성과 수준)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댓글 12 / 1 페이지

구구탄별님의 댓글

작성자 구구탄별 (119.♡.249.28)
작성일 10:54
원래 취미로 뭘 하는게 대부분 과시하고싶어서 하는거 아닐까 싶어요

diynbetterlif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0:55
@구구탄별님에게 답글 도서관 대출 목록에 조선어학회지가 찍혀 있는걸 보는 것도 흐뭇할 것 같습니다. 내가 귀한 고서적을 살려내는데 일조했어! 하고요. :)

FV4030님의 댓글

작성자 FV4030 (210.♡.27.130)
작성일 10:55
까치 책들은 가독성이 너무 안 좋아요. ㅠㅠ. 말 그대로 과시용 책이 되기 쉽습니다. 하...

diynbetterlif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0:56
@FV4030님에게 답글 가독성만 개선한다면.. 내용면에서 필요한 걸 수도 있고요..;;

마을이님의 댓글

작성자 마을이 (218.♡.171.44)
작성일 10:58
이번 논란 보면서 데자뷰를 느꼈던 게
연예인들 기부하면 홍보하려고 기부했다고 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푼 기부도 안 하는 사람들이 홍보라도 기부한 사람을 까는 어이없는 일이죠.

김영하 작가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서는 읽고 싶은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다.

diynbetterlif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1:14
@마을이님에게 답글 홍보 목적으로라도 기부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책도 과시용으로라도 부러 보존가치가 있는 잘 찾지 않는 책도 대출하고 구매하는게
도서시장과 국민 전체의 지적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라서 ..

김영하 작가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일단 빌리고, 사고 합시당

twinbird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twinbird (118.♡.245.98)
작성일 11:04
어렸을적 책만 보고 지냈던지라
나이먹고 책을 안읽다시피 하면서도 책에 대한 뭔지모를 끌림이 엄청나게 강해서 사모아둔 책만 방하나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ㅎㅎ
애들도 훌쩍 커서 이거 정릴 해야 하는데..깝깝..하군요ㅠㅠ

diynbetterlif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1:16
@twinbird님에게 답글 ㅋㅋ 어제 저희 사춘기 중딩이 자기 숙제할 때 엄마를 앞에 앉혀놓고 책을 읽으라고 하더군요.
나는 문제집을 풀 테니 엄마는 <독서>를 해라! 고요.

엄마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씨를 쓰렴..에서 역할이 바뀐 느낌이었습니다? ㅎㅎ;;

아리아리션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아리아리션 (125.♡.111.106)
작성일 11:22

저희집 과시용 책 4권입니다.
켐벨 생명과학, 일반화학, 일반물리학2권..
제껀 아니구요 ㅋㅋㅋ
대충 5천페이지쯤 될것 같은데 소소하네요.

diynbetterlif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1:24
@아리아리션님에게 답글

친하게 지냅시다. 과시용으로

밝은계절님의 댓글

작성자 밝은계절 (211.♡.180.253)
작성일 11:54
그책이 그냥 일회성이로 읽혀지고 버려지는 그러한 종류의 책ㅇ라면 폐기에 어느정도 찬성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모두 역사의 한페이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줄이라도 장식할 수 있을텐데, 돈의 논리 앞에 저런 결정을 내렸다는데 무척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diynbetterlife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no_profile diynbetterlife (220.♡.37.28)
작성일 12:19
@밝은계절님에게 답글 <돈의 논리>가 맞는 말씀 같습니다. 자료의 가치, 현세대/후대에 전해져야 할 내용, 등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방학도 반납하고 귀한 작업을 해주신 울산대 인문대 교수님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걸 기사화 한 것도 좋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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