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조승리,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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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SNS에 추천을 해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문대통령이 추천을 하신 책이라고 해서 다 보지는 못하고, 시작한 책이라고 해서 끝까지 다 읽지도 않습니다.
이 책은 첫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아 이 책은 다 보겠구나'라는 감이 오더군요.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구나 싶습니다.
아까워서 하루에 한편씩 보는 중인데, 오늘 아침에 본 에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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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향기 되어
그를 만난 날은 눈발이 휘날리던 2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나는 직업수련원 학생들이 실습할 만한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 가구 수가 많은 경로당을 방문하는 중이었다. 노인회장님과의 약속 시간에 맞춰 경로당 문을 밀고 들어서는 실내는 노인들의 도란거림 대신 여가수의 애잔한 음색이 낯선 언어로 흘러넘쳤다. 나는 잠시 현관에 서서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언어는 생소했지만 멜로디는 익숙했다. 따라 들어온 냉기를 털어내며 기억을 더듬었다.
.......김추자! 그렇다, 그것은 김추자의 <눈이 내리네>라는 곡이었다.
안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나는 장지문을 열고 어르신께 인사를 올린 뒤 방문 이유를 밝혔다. 그는 내가 시각장애인인 걸 알아차리고 나를 소파로 안내해 따듯한 차를 내주었다. 경로당 안은 이전 방문자와 달리 한산하다 못해 적막했다. 연유를 묻자 그는 회원 중의 한 분이 돌아가셔서 다들 장례식장에 가셨다고 했다. 상황을 보고받은 사무실에서 내게 현장에서 퇴근하라는 연락을 보냈다. 이에 콜택시를 부르려 했으나 업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눈도 내리고 도시 외곽의 임대아파트라 차편 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는 상황을 살피더니 두어 시간 후면 시내 병원에서 투석을 받고 돌아오는 노인들이 있으니 그 차편을 이용하면 된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는 중에도 눈은 쉴새 없이 쌓여갔다. 낯선 언어의 음악과 가수의 허밍이 건조한 공간에 내려앉았다. CD는 그새 한 바퀴를 모두 돌고 다시 <눈이 내리네>로 돌아와 있었다.
'이 곡처럼 오늘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자 노인이 물었다.
"이 노래를 압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추자 곡이라고 말했다.
"김추자요? 아뇨, 이건 원래 러시아 노래입니다."
그는 낯선 언어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눈송이보다 장미 꽃잎이 휘날리는 듯 밝고 화려하게 느껴졌다.
"어쩜 그렇게 러시아 노래를 잘 부르세요?"
내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내가 러시아 사람이니까요. 나를 낳은 건 이 땅이지만 나를 키운 건 차갑고 황량한 러시아 땅이라오."
그는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섬으로 강제이주당한 조선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침략자들은 밀목장, 군수공장 등에서 조선인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2차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사할린의 조선인들은 고국의 품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지 고향은 충남 서천이었습니다. 징용에 끌려갈 때 나는 젖먹이 어린애였어요. 1997년부터 사할린 동포 영주 귀국이 시작되었는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당시 내가 일흔이 다 된 나이였으니 당연한 결과지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는 그가 왜 한국에 영주 귀국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가 말했다.
"내 이름은 공경동입니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내게 러시아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습니다. 비록 조국이 자신을 외면한다해도 자신은 조선인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나는 2001년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영주 귀국했습니다. 마침 퇴직을 한 데다가 아버지가 꿈에서까지 염원했던 고향 땅에서 살아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나는 사할린으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중이에요. 일생의 마지막을 내 땅 내 자식 곁에서 보내고 싶어졌어요. 아마 이런 게 귀소본능인가 봅니다."
그는 굳이 입구까지 나를 배웅하면서 러시아 말로 작별인사를 건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향을 떠나던 날 외조부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고 말았다.
"얘야! 언제든 돌아오너라!"
흩어졌던 기억들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아래 서 계시던 외조부의 그림자가 눈앞에 일렁였다.
외조부는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유교적 관습이 뼛속 깊이 새겨진 옹골진 선비였다. 굶어죽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할 분인데 어찌어찌 외손녀인 나를 떠맡게 되었다. 당연히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유년기의 내가 외조부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다.
"이 변변치 못한 것."
외조부는 내가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신을 뒤집어 벗어놓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호랑이 눈을 뜨고 야단을 치셨다. "이 본디 없고 변변치 못한 것!" 악의 없이 툭툭 내뱉으신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한기면 외조부는 난을 치거나 불경을 필사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외조부가 지필묵을 꺼내면 나는 잔신부름을 도맡아야 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다. 고사리손이 가는 먹이 뭐 그리 흡족했을까만은 눈치가 빤했던 나는, 내가 먹을 갈면 외조부가 기특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외조부의 난 치는 솜씨는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빼어났다. 그래서 외조부가 난을 치실 때면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시중드는 나는 죽을 맛이었다.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손님이 내게 기특하다고 칭찬이라고 할 참이면 외조부는 못마땅한 어조로 뇌까렸다.
"외손주 따위야 방아깨비만도 못한 거 아니요!"
멋쩍고 무안해진 나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철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더부살이 신세가 고달팠다. 그때마다 외조부가 야속했지만 밉고 싫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보다 외조부에게 버림 받을까봐 두려웠다.
한글을 깨치자 외조부는 매일 다라니경을 열 번씩 연속으로 낭독하게 했다. 다라니경은 불교의 주문 중 하나로 자손이 부모 살아생전 만 번을 낭독해드리면 부모가 천수를 하고 극락에 든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불경이다. 외조부는 아랫목에 목침을 베고 누워 내 독경소리를 들으며 낮잠에 드시곤 했다. 매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열 번씩 낭독하는 것은 곤혹이었다. 외조부는 독경이 서너 번 반복될 때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드셨는데 내 독경소리가 줄어들거나 도중에 멈출 참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일어나 호통을 치셨다. 나는 약은꾀를 내다가 다라니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 벌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외조부가 나를 미워하신 것만은 아니었다. 샛강에 빠져 죽다 살아난 날도, 열병에 걸려 먹을 것을 게워내고 앓아 누운 날도 외조부는 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방문 앞을 오가셨다. 병을 털어내고 밥상에 앉으면 외조부는 또 혀 차는 소리로 통바리를 놓으셨다. "이 변변치 못하 것."
그러면서도 굴비 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주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학교 행사에 모두 참석해주셨다. 다른 사촌들과 날짜가 겹쳐도 예외 없이 내게 와주셨다.
열여섯 살의 화창한 여름날, 나는 쪼그라든 외조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용서를 빌었다. 외조부 말씀대로 변변치 못하게도 눈이 멀어가고 있다고, 정말 방아깨비만도 못한 손녀가 되어버렸다고 아뢰었다. 노쇠한 심신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생떼같은 혈육의 캄캄한 현실 때문이었을까. 외조부는 슬픔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목놓아 우셨다. 이윽고 고향을 떠나 도시의 장애인학교로 떠나는 날이었다. 외조부는 버스 타는 걸 보겠다며 굳이 신작로까지 따라 나오셨다.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서자 외조부는 내 팔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언제든 돌아오너라!"
나는 차마 외조부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외조부는 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에게서 외조부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일까, 러시아 할아버지를 한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 차편을 마련해준 것에 대한 인사와 함께 전할 말이 있었다. <눈이 내리네>는 러시아 곡도 김추자의 곡도 아니었다. 원곡이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그것을 자국어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찾은 경로당에 그는 없었다. 병환이 깊어져 사힐린으로 출국했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다.
도시의 장애인학교로 떠나온 후 나는 외조부께 연락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혹여 몸이 성치 않은 자손으로 인해 체면이 상하실까 싶어서였다. 외조부가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 외숙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외조부의 병환이 깊어져 이번 명절엔 자손들이 모두 모이는 게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당장이라도 고향집에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력을 잃어가는 내 모습을 외조부께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귀천을 앞둔 쇠약한 노인께 마지막까지 걱정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다 핑계였다. 마을 쭉정이처럼 쇠약해진 조부를 나는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의 외조부는 호랑이 눈을 치켜뜨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본향 집을 지키셔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명, 말 그대로 맑고 푸른 봄날에 나는 귀향길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향했다. 길은 넓어지고 싸리문 담장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공기의 질감이, 발끝의 감각이 고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터가 되어버린 본향 집터 앞을 오래도록 서성였다.
외조부가 없는 고향은 낯선 언어로 듣는 익숙한 노래처럼 어색하고 괴기스러웠다. 외조부가 지키지 않는 고향은 더는 본향이라 할 수 없었다.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귀소본능이란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외조부 앞에 포와 술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방아깨비만도 못한 외손녀의 용서를 비는 대신 열 살 계집아이로 돌아가 낮잠이 드신 외조부께 다라니경을 암송해드린다. 외조부는 찔레꽃 향기가 되어 내 손등을 도닥여주신다.
돼지햄스터님의 댓글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