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키에서 말하는 우상호
vader

Lv.1 vader (121.♡.225.225)

2024년 12월 9일 PM 01:04 · 수정됨(14:14)

조회 1,273 공감 0

작성자의 개인적 의견이 섞여서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위키 글은 몇번 걸러 들어야 합니다만... 

우상호 글을 한번 찾아보니 그가 저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요. 이 글이 사실인가요?

우나이퍼? 허허허.... 


우상호는 자신을 추천한 대학 내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내방식대로 맡겨달라고 요구한다. 우상호가 출마한 1987년 연대 학생회 선거는 약 500명이 모였는데, 지원 유세에 문화제 방식의 선거운동이 가미 되자 약 2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비폭력주의 집회의 일환으로 등장한 문화제 형식 선거운동은 다른 대학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내 운동권 서클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기존 시위방식이 달라지자 불만을 가졌다. 우상호는 공개토론을 열어 비폭력 집회 방침을 관철한다.[15] 늦은 참여로 인해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음을 이해한 우상호는 자신의 노선을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의 열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중요'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의 정치활동과도 이어진다.[16]


이 때 학생운동 지도부에 당선되면서 폭력운동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의 학생운동을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 변화를 시도하다 강성 지하 서클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한 예로 운동권 사람들과 전두환 이야기를 하다가, 전두환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17] 학생회장이 된 우상호가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전환시키자 급격하게 학생들이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체육관 선거를 규탄하다 결국은 6월항쟁의 주역이 된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향후 정치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 세력은 강경해진다. 이에 앞서 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서울대 박종철 군의 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됐다는 폭로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터지면서 정국이 발칵 뒤집힌다.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추진했다. 이들은 집회 전날인 1987년 6월 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전보다 다수가 참여한 집회 규모에 당황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직사로 쏘기 시작하고 여기서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이 사망한다.




댓글 (4)

  • HJLee1120

    HJLee1120 Lv.1

    24.12.09 · 58.♡.14.247

    그때는 맞으나 지금은 틀린 인가요?ㄷㄷ
  • 뽀로로

    뽀로로 Lv.1

    24.12.09 · 125.♡.205.92

    근데 저 당시는 NL주사가 운동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운동방식을 저렇게 바꾸는 게 추세였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열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라는 문구는 당시 대학 학생회 연합인 '서대협'의 슬로건이기도 했죠.

    덧. 다만, 저때 저런 방식으로 운동을 펼쳐서 부분적으로나마 승리했고 그런 승리의 경험이 체화되어 아예 다른 방법을 구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만.
  • 글렌모어

    글렌모어 Lv.1 → 뽀로로

    24.12.09 · 59.♡.226.150

    그때는 맞았거나 틀렷거나 관심 없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우상호는 의심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의심 받는 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우상호입니다. 그럼에도 변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변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우상호이며 그래서 의심 받는 것입니다.
  • 뽀로로

    뽀로로 Lv.1 → 글렌모어

    24.12.09 · 125.♡.205.92

    물론 그렇습니다. 예전의 타성에 젖어 새로운 시대를 능동적으로 맞이하지 못하면 뒤쳐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이죠. 본인의 의도 및 의사와는 상관 없이 말입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