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이 만든 악법, 서얼금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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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종로지킴이
작성일 2025.01.29 09:16
2,181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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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시행하여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둘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양반들은 본처 외에 많은 수의 첩을 두었는데, 이들 첩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서얼이었다. 첩의 신분이 양인이면 서자(庶子), 첩의 신분이 천인이면 얼자(孽子)라 하였는데, 서얼은 이 둘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서얼은 일반적인 양반 자제와 달리 많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대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제정되면서 원칙적으로 관직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서얼은 과거(科擧)의 문과(文科)뿐만 아니라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도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되었다. 혹시 관직에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승진에 제한을 받거나 혹은청요직(淸要職)으로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나마 일반 관료가 아닌 기술직 관료로는 진출이 가능하였는데, 이 경우에도 아버지의 관품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승진에 제한이 따랐다. 특히 얼자는 아버지의 관품이 동일하더라도 서자에 비하여 승진이 더욱 제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얼이 기술직 등으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중인(中人)들과 비슷한 사회적 신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들 서얼 출신 중에서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배출됨에 따라 서얼들을 관료에 등용하자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대에는 규장각(奎章閣)의 관원으로 서얼이 등용되기도 하였다. 서얼에 대한 차별 금지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에 이르러서야 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뿌리 깊은 관행이었고, 비단 서얼 본인뿐만 아니라 후손들 역시 ‘서계(庶系)’라 하여 양반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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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 / 1 페이지

BBlu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BBlu
작성일 어제 09:17
이성계가 말년에 뿌린 똥의 결과죠 ㄷㄷ

종로지킴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종로지킴이
작성일 어제 09:20
@BBlu님에게 답글 고려 태조 왕건에 비하면 이성계는 애교 수준 아닙니까?

Typhoon7님의 댓글

작성자 Typhoon7
작성일 어제 09:28
형제의 난으로 이복 형제 몰살하던 그 버릇 못버리던건가요. 대놓고 죽이는 대신 출세길 막는걸로... -.,-

오리뒤뚱뒤뚱님의 댓글

작성일 어제 09:29
'신분제강화' '갈라치기' '혐오'는 오래된

 기득권 유지 방법 중 하나죠

GreenDay님의 댓글

작성자 GreenDay
작성일 어제 09:34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제군주가 통치하는 왕조시대에는 신분 차별의 시대였습니다.
기본적으로 왕족과 귀족층이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직업에 따라 피지배층의 신분도 세분화되었습니다.

지배층의 자식들도 양 부모의 신분에 따라 신분이 갈렸는데요.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모계신분제였습니다.

어머니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을 결정했습니다.

왜나면 아버지의 신분이 천민인데 어머니의 신분이 양반인 경우는 사회가 용납할 수가 없기때문이죠.

따라서 아버지의 신분이 지배층인 귀족이라도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모계신분제 사회입니다.


조선의 경우에도 본문에서 설명하신 것처럼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적자와 서얼이 갈리고 서자와 얼자로 구분되었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 인데, 귀천상혼 제도가 서얼 제도와 유사했습니다.

서양의 왕족과 귀족의 계승권은 작위를 계승해야 작위에 속한 토지 등의 유산과 권한을 계승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분이 낮은 배우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계승권은 상실되고 차순위 계승자가 작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어떠한 면에서는 서양의 귀천상혼은 조선의 신분제보다 더욱 가혹한 면이 있었는데요.

조선의 왕은 왕비가 낳은 적자가 아니더라도 왕족이였고, 대군이 충분히 있어서 대군만으로 계승이 가능했던 명종까지는 서자의 즉위가 없었지만, 선조부터는 서자의 즉위가 흔했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서자는 아들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계승권은 당연히 없었고요.

또한 왕의 첩실도 조선에서는 정비보다는 품계가 낮지만 왕의 부인이였으나 서양의 첩실은 그냥 정부였습니다.

그것도 프랑스의 경우엔 남의 부인이였습니다.

정부로 들이고 싶으면 귀족 중에 만만한 귀족과 문서상 결혼을 시킨 후에 궁에 들여서 정부로 데리고 살았던 겁니다.

역사의 유명한 정부가 프랑스 대혁명때 같이 처형당한 뒤바리 부인입니다.
베르사유의 장미에도 출연하는 인물입니다.

종로지킴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종로지킴이
작성일 어제 09:41
@GreenDay님에게 답글 루이 15 세의 사망과 함께 나락으로 갔습죠.

RanomA님의 댓글

작성자 RanomA
작성일 어제 09:46
헨리8세가 부인을 그리도 갈아치운 게, 서자보다는 적자를 많이 얻으려고 혼인을 숱하게 한 거였죠. 이혼하려고 카톨릭에서도 탈퇴했고요. 에드워드를 얻으면서 소원 푸나 했는데 왕이 된 지 얼마 안돼서 요절... 결국 왕위는 딸 둘을 거쳐 결국 헨리 8세 누나의 후손에게 왕위가 돌아갔죠.

종로지킴이님의 댓글의 댓글

대댓글 작성자 종로지킴이
작성일 어제 09:49
@RanomA님에게 답글 엘리자벳과 메리의 피의 전쟁이.....

lache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lache
작성일 어제 09:56
소수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훼손시키는 거죠. 자유민주사회가 된 지금도 권력과 부로 만든 신계급이 저런 의도의 행동들을 하죠.  인류가 지속되는 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저런 불합리한 행동들은 계속됩니다.

눈가리고아앙님의 댓글

작성일 어제 10:21
처첩을 통제하지 않으면 상위계층이 너무 비대해져 그것대로 또 사회가 위험해집니다
"전근대 신분제사회 관점에서" 서얼차별이 계층피라미드 균형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귀족남성의 결혼권 독점의 완충역할도 했겠지요

버미파더님의 댓글

작성자 no_profile 버미파더
작성일 어제 14:10
개인적인 생각에 관직 문제도 좀 그렇지만
처첩이 낳은 자식의 재산분배를 남녀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하는 방향으로 추가적인 가닥을 잡았더라면
첩을 두는 걸 무척이나 부담스러워서 함부로 못했을 거 같은데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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