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 (211.♡.49.151)
2024년 4월 20일 PM 03:46 · 수정됨(20:5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하면서 남긴 기록을 보면 말단 무사부터 다이묘까지 감탄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방마다 널려 있는 읍성과 도시들인데, 그 때 보았던 읍성 성곽과 관아, 마을을 보는 시선이 마치 시골의 촌놈이 도시 빌딩을 본 것과도 같았죠.
당시 일본이 조선보다 인구와 총생산은 더 앞섰음에도 저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그림은 무엇일까요?
당시 일본 최정상급 다이묘던 다케다 신겐의 거성인 츠츠지가사키관(躑躅ヶ崎館)입니다.
이 곳은 당시 다케다 신겐이 다스리던 카이 지방의 중심지이자 정치 경제 문화 행성의 중심지였죠.
전국시대의 이미지로 오사카성 같은 거대한 성과 천수각을 떠올리는 분들이 있겠지만 실제 저 정도만 되도 일본에서 상당한 크기의 성입니다.
그런데도 주변은 도시는 커녕 마을만 형성되었습니다.
조선으로 치면 함흥이나 전주 같은 도청소재지조차도 도시가 형성되지 않을 정도로 열약한 곳이 바로 전국시대 일본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고 오자면 오닌의 난이 일어나서 교토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가 지방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는 다시 돌아왔고 남은 사람들 중에 일부는 시골에 정착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지방에서도 도시민으로 살았습니다.
그 교토의 당시 인구는 몇만 수준으로 작은데다가 그 다음으로 크던 사카이가 겨우 1만 남짓이었으니, 오닌의 난 때 도망친 교토 사람 숫자도 아주 적죠.
그 도망친 사람 중에서도 지극히 일부가 지방에서 도시민으로 정착한 것 때문에 전국시대 초기에 도시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유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는 지방도시에 대한 관념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시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그러한 소수의 사람조차도 도시의 발달에 영향을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서의 지방도시란 개념은 전국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 성,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성에서야 나타나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게 되죠.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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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파크원투쓰리
24.04.20 · 39.♡.246.105
이런 이야기 더 해주세요~ -
Nnewko
24.04.20 · 101.♡.133.213
{emo:onion-055.gif:50} - 매
매트릭스
24.04.20 · 221.♡.132.198
흥미롭습니다 {emo:onion-139.gif:50} -
보보따람
24.04.20 · 211.♡.50.62
일본의 상류층들은 이미 중국과 교류를 했습니다.
당나라 시절 이미 한반도를 배제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를 했습니다.
왜구들이 명을 들쑤시던 시절 우리 조선보다 더 나은 문명을 이미 접하고 있었지요.
너무 무시하는 국뽕에 차오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
코코미
→ 보따람 작성자
24.04.20 · 211.♡.49.151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7122773
시간나면 이 글도 한번 읽어보세요.. -
두두냥아빠
→ 보따람
24.04.20 · 218.♡.195.56
그리고 894년 이후 교류가 끊어지고 이후 수 백년간 열도 안에서 지들끼리 지지고 볶느라 정신 없었죠.
일본을 너무 무시하는 국뽕에 차면 안되지만, 일본에 매몰되는 일뽕도 무섭습니다. -
보보따람
→ 두냥아빠
24.04.20 · 211.♡.50.62
894년 이후 교류가 끊어졌다는 것이 중국과의 교류인가요? 한반도와의 교류인가요?
열도안에서 지들끼리 지지고 볶았지만, 그로 인해 상업이 발달한 것은 사실입니다.
상업의 발달은 도시의 발달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강조한 것입니다.
송나라와도 교류는 매우 커서 화폐경제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공식적으로 듣는 글보다는 일본 역사책을 보고 그것에 근거해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소수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국내 저자가 쓴 역사책 이라도 가지고 참고하신다면 저도 참고하겠습니다.
저는 방송대 일본고중세사 교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공 도서관에서 쉽게 대출도 가능합니다. -
두두냥아빠
→ 보따람
24.04.20 · 210.♡.25.108
일송 교역이 10~13세기에 있었죠. 하지만 고려는 훨씬 큰 규모로 중국과 아랍쪽과 교역했습니다. 전근대 시기에 육로와 해로로 이어진 지역과 험한 바다를 건널 수 밖에 없는 지역은 교류의 양과 질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게 당연하고요.
게다가 일본과 중국의 교류는 끊어진 적이 많았지만, 한반도의 왕조들은 꾸준히 중국의 왕조들과 교역했습니다.
송나라와 교류로 화폐경제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고려도 해동통보, 삼한통보, 해동중보 등의 동전을 만들고, 활구(은병)라는 은 화폐도 있었어요.
책도 좋지만 아래 블로그 들어가셔서 많은 내용을 찬찬히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https://blog.naver.com/halmi
일본의 문화를 낮게 보는 게 아니에요. 일본 고유의 독특한 문화에 관심도 많고 높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일뽕들은 한반도의 문명들이 일본 열도의 문명보다 나은 부분을 조금이라도 언급하면 하면 유독 아니라고 반발하더라고요. 그게 못마땅한 겁니다. -
보보따람
→ 두냥아빠
24.04.20 · 211.♡.50.62
그래서 한반도에서 화폐 경제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말이지요. 중기까지 실패했고요.
그것은 세금 징수와 관료들의 급여 지급을 무엇으로 하냐가 기준이 됩니다. 화폐가 안되니 대동법이라도 겨우 한 것이고요.
우리나라에 화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실하게 밑바탕이 되었냐 입니다.
님은 블로그
저는 대학교재가 근거이지요. -
두두냥아빠
→ 보따람
24.04.20 · 210.♡.25.108
일본도 전국시대까지 화페 경제가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어요. 에도 막부까지도 하타모토와 고케닌에게 화폐로 봉급 준 게 아니라 쌀로 줬어요. 조선처럼.
대동법은 공물에 대한 현물납을 폐지하고 대신 지역별로 쌀·베·돈으로 납부하게 한 거에요. 화폐 경제의 성립 여부가 아니라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세제 개혁과 관련 깊어요.
"부과된 대동세는 봄 · 가을로 6말씩 나누어 징수(뒷날에는 가을에 전액 징수함)하되, 산군(山郡)에서는 농민의 편익을 위하여 같은 양의 잡곡이나 소정의 환가(換價)주35에 기준하여 무명, 베, 화폐로 바꾸어 내게도 하였다. 단, 무명이나 베로 납부할 경우에는 5승(升) 35척(尺)을 1필(疋)로 했는데, 그 환가는 대체로 쌀 5∼8말이었고, 화폐는 1냥(兩)에 쌀 3말 정도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246
제가 링크 드린 블로그가 어떤 블로그인지 모르시죠? 채널 아케치라고 어설픈 일본 조ㅈ문가들 쌈싸먹는 양반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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