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ECASTLE (39.♡.79.180)
2024년 4월 20일 PM 07:39 · 수정됨(20:07)
링크( https://damoang.net/free/335820 )의 글에서 코미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보고 이전부터 찾아본 바가 있어서 몇 자 남깁니다. 제목은 ◆나 거창하게 지었지만, 별 건 없고... 제가 이전부터 주요 관심사로 놓고 공부하던 곳이 제목의 장소라서 가져다 쓴 겁니다. 해당 도시가 링크의 코미님 글에서도 언급되었고요.
먼저, 링크의 글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에 참전한 일본의 무장이나, 병사들이 조선의 도시에 대해서 경탄했다는 기록에 대한 겁니다. 아마도 해당 이야기는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토대로 언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해당 이야기에서 지정된 도시는 모든 조선의 성읍에 있는 도시가 아니라, 한양 = 서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곳에 중요하고 화려한 건물이 있다는 언급이 있고, 다른 조선의 지방도시와는 달리 2층 이상의 고층 건물도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걸 조선 전체로 치환해버리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검약과 더불어 사치를 금했던 조선에서는 특별한 건물(관청, 사찰)이 아닌 이상 고층의 건물을 잘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에도시대까지도 사치와 낭비로 점철했던 일본과는 환경과 양상이 다른 문제라서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또, 조선은 건물의 크기나 규격도 그 건물에 살고 있는 주인의 지위나 위치에 따라서 엄격히 제한을 받았으므로 권력이나 재력이 강하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도시의 규모가 문제인데, 보통 1만 명을 기준으로 5,000여 명이상을 인구밀집지역 = 도시라고 한다면,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의 도시는 50개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해서, 일본의 경우에는 1만 여 명으로 올려잡아도 센고쿠 말 ~ 에도 초까지 대략 100여 개 정도의 도시가 일본 전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당 근거는 아래의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近代以前の日本の都市人口統計(근대 이전의 일본의 도시인구총계)」( https://ja.wikipedia.org/wiki/%E8%BF%91%E4%BB%A3%E4%BB%A5%E5%89%8D%E3%81%AE%E6%97%A5%E6%9C%AC%E3%81%AE%E9%83%BD%E5%B8%82%E4%BA%BA%E5%8F%A3%E7%B5%B1%E8%A8%88 )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맨 아래의 도표를 보면 몇 명의 연구자들마다 도시 인구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그 말 그대로 어느 지역까지를 도시로 볼 것이냐? 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의견이 나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라시대 경주의 인구를 놓고 논증하신 전덕재 선생님의 『신라 왕경의 역사』 같은 서적을 읽어보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도성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하느냐에 따라 적게는 수 천에서 많게는 1~3만의 인구가 넘나듭니다.
세 번째로 제목에서 언급한 도시인 고후(甲府)인데, 이 지역을 언급한 것은 위에서 코미님의 글에서 언급한 쓰쓰지가사키 저택(躑躅ヶ崎館)이 있는 지역이 이곳이며, 현재의 야마나시 현의 중심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고후는 그 역사 자체는 오래된 도시가 맞습니다만, 본격적으로 이곳이 중심지역이 된 것은 센고쿠 시대 이후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의 도시들은 오랜 기간 해당 지역에서 사람들이 살기 좋은 위치(교통, 물자 등)에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전을 거듭한 곳이 많기 때문에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도시의 안정성도 매우 높은 편입니다. 반면, 일본의 도시들은 시작이 어떤 지위를 가졌느냐도 상당히 갈리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후도 그런 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면 특정한 지역의 관청 소재지를 놓고 언급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그러하지만, 일본에서도 고대부터 거대한 지역 단위로서 구니(国, 이 표현 자체가 우리 식으로 보면 웃기는 표현이지만 일단 여기서는 넘어갑니다. 조선시대로 치면 道의 개념)가 있고, 그 구니를 관할하는 지역총괄자로서 고쿠시(国司)가 있습니다. 이 고쿠시가 머무르면서(실제로는 대리를 보내는게 더 많았지만) 지역의 업무를 관장하던 장소 = 관청과 그 일대를 고쿠후(国府)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이 고쿠후가 있던 곳이 고대부터 지역 중심지로서 발달해 왔습니다. 해당 지역의 가장 중요한 사찰이나 신사인 이치노미야(一宮)도 고쿠후 근처에 있는 경우가 많고, 그 지역이 교통도 편리하고, 관청 주변에 필요한 편의시설도 모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후는 이름은 해당 구니의 이름인 가이(노)쿠니(甲斐国)의 甲과 어떤 중심적인 업무 관장을 의미하는 후츄(府中)를 결합시켜 만든 이름이라서 이전 시기부터 가이노쿠니의 고쿠후가 있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닙니다. 아래의 야마나시현 중심부 지도를 보시면, 一宮, 二宮, 三宮 등이 표시된 흰색 네모칸이 밀집된 중간 지역이 고대로부터 위치했던 가이의 고쿠후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그 중심을 지나고 있고, 동쪽의 간토와 남쪽의 도카이도로 연결되는 중요한 지역이라서 숙박시설이나, 마굿간 등도 주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반면, 고후는 거기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甲府市라는 현재의 지명이 보이고, 거기에서 다시 북북서 방향으로 주황색 선(길)을 따라서 올라가야지 위에서 언급한 다케다 신겐의 본거지, 쓰쓰지가사키 저택이 나옵니다. 일부러 교통이 편리한 곳이 아니라, 방어상의 이점 등을 이유로 그곳에 마련한 겁니다. 이 쓰쓰지가사키 저택 바로 뒤에 요가이 산(要害山)이라고 불리는 말 그대로 요새 같은 산이 있고, 그 산에 마련된 요가이성에서 신겐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신겐이 태어났을 때는 외부 침략으로 쓰쓰지가사키 저택이 사실상 방기되었고, 아버지인 노부토라는 남쪽으로 내려가 방어하러 가고, 소수의 인원과 함께 산성에 있었던 어머니가 신겐을 낳으면서 아버지가 전투를 이겼기 때문에 신겐은 어렸을 때부터 승리를 부르는 그런 인물로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나중에는 다케다씨 전통(!)대로 부자간의 극심한 대립 끝에 '왕위를 계승중입니다 아버님'이 됩니다만...)
그렇다면, 왜 다케다씨는 고쿠후 근처가 아니라, 고후를 중심지로 삼았을까요? 그것은 원래 이곳이 다케다씨의 본거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이사와(石和)라고 해서 고쿠후 북쪽에 있었던 쓰쓰지가사키 저택과 비슷한 입지에 다케다씨의 오랜 본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허구헌날 서쪽의 우에스기씨, 호죠씨, 남쪽의 이마가와씨에게 털려서 방어상의 문제도 있었거니와 향후 서쪽이 아니라 북쪽이나 남쪽으로 진출하려고 하면 가이 내 다른 토호들의 본거지와 거리를 두면서 관리상의 이점도 있는 고후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선택은 아버지 노부토라 때의 일로 고후는 도시라는 의미의 개념으로 봤을 때는 아직 그 기준에 부합되지도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도시를 고려해도 원래 고쿠후가 있었던 쪽이 인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다케다씨가 중심지를 이전하면서, 이 남쪽으로 펼쳐진 평지에 시가지가 들어섰고, 에도시대에는 고후성이 세워졌으며, 현재까지도 야마나시 현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깡촌 중에 하나였던 곳이라서 위에서 언급한 위키피디아 링크에서도 고후는 특정한 시기를 제외하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는 되어야 겨우 1만 여 명이 넘는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에 입지조건이 훨씬 좋았던 다른 도시들은 5만 명 이상에 주변도시까지 1만 명이 넘는 곳이 허다했습니다.
위 위키피디아 링크와 더불어 조선의 도시 인구를 참고해볼 수 있는 것이 아래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내고 있는 『戶口總數(호구총수)』( https://kyu.snu.ac.kr/wp-content/nas01/202112/%E6%88%B6%E5%8F%A3%E7%B8%BD%E6%95%B8.pdf ) 자료집입니다. 숙종 때인 18세기 인구라서 16세기 전후인 센고쿠 시대 일본 인구와 비교하면 상당히 많이 차이가 납니다만, 5천 이상의 도시는 49개로 50여 개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일본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도시 범위의 문제가 있긴 해도 이미 100개 이상의 도시가 존재했습니다. 그것도 1만 명 이상만. 코미님께서 센고쿠 시대 사카이(堺)의 인구가 1만 명 남짓이라고 하셨으나, 제가 아는 바로는 16세기 초에만 해도 이미 3~7만이 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카이 지역의 경제력을 오사카로 흡수하면서 이전과 달리 쇠했지만, 결코 작은 수준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한 때는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동쪽 끝에서 무역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던 도시이기도 했고, 유럽 선박도 들어오던 몇 안되는 국제무역도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역적인 한계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은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도시들이 조선에 비해서 꽤 다양한 루트로 발전해왔던 것도 중요합니다. 사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몬젠마치(門前町). 특정한 종파(죠도신슈, 浄土真宗)를 중심으로 발전한 지나이초(寺内町, 또는 지나이마치), 항만을 중심으로 발달한 사카이 같은 미나토마치(港町), 그리고 무사를 중심으로 그 본거지 주변에 마련된 계획도시인 죠카마치(城下町)가 있습니다.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왠만한 도시들은 죠카마치에 흡수되어서 현재까지도 중심지가 죠카마치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적어도 센고쿠 시대 중기까지는 다양한 루트로 도시가 발전했습니다. 특이한 케이스로 나가사키가 있는데, 해당 지역은 원래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지역이지만, 해당 지역의 영주가 이 지역을 예수회에 기증했고, 예수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수 만 명이 거주 또는 거쳐갈 정도로 도시화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이런 다양한 성격의 도시들이 무사들의 본거지 = 성을 중심으로 한 성하도시 = 죠카마치에 대부분 흡수, 병합되면서 다양성, 경쟁력이 줄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로 작은 중소도시들이 거대화되는 이점도 있었을테니 어떻게보면 우리보다 도시화가 빨랐다고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고후로 돌아와서 쓰쓰지가사키 저택 남쪽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지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가신단 저택이, 다시 그 남쪽으로 시가지와 시장 등이 형성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남쪽이 중심지역입니다. 에도시대에 성이 구축된 것도 이곳 평지였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시면, 거관(巨館)이 쓰쓰지가사키 저택이고, 남쪽의 이치조코 산과 그 일대가 현재의 중심지이자 에도시대의 성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만 보면 이 좋은 지역에 왜 인구가 많이 살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현재와는 지형이 많이 달랐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래의 야마나시 현 수계 변화를 보시죠.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진하고 가늘게 위치한 부분이 현재의 수계이며, 과거의 수계는 연하고 좀 더 넓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일본에서 수해방지를 위해 노력한 인물 중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데, 맨 위의 16세기 이전 수계를 보시면 고후성 남쪽으로 1km도 안되는 거리까지 꽤 큰 규모의 하천이 존재했고, 그것도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어서 각종 소설에서 등장하는 표현처럼 매년 도박같은 농사를 했습니다.(실제로 신겐이 태어나기 전부터 가이 지역은 각종 끝판왕급 자연재해가 3년에 2회 꼴로 나오던 지역입니다.) 방어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식량의 안정적인 공급과 그로 인한 인구 증가를 노리기가 어려운 지역입니다. 이걸 돈과 노력을 때려부어서 개선한 것입니다. 이걸 다케다씨가 아닌 다른 인물이 왔다고 해도 드라마틱한 도시화는 어렵다고 보며, 단순히 얘네들이 미개하거나 생각이 없어서 그 지역에 살았던 것도 아니고, 또 발전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단순히 특정한 시기에 발전을 거듭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성의 규모가 작다고 그 기술과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 하천 개발을 위해서 거듭했던 연구가 지금까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일본에 지방도시 관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가이노쿠니, 고후를 중심으로 본다면 그럴만한 환경이 그 지역민의 노력으로 개선되기 전까지는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끝마치고자 합니다. 아마 기회가 된다면 하천 정비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요.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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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민
24.04.20 · 136.♡.35.49
흠..{emo:onion-019.gif:50} -
코코미
24.04.20 · 180.♡.243.17
뭐.. 그래서 다케다 신겐 휘하에는 아노슈라는 전문 공병 내지는 건설집단이 잇었고...
거기에 저 강의 치수를 위해 신겐즈츠미라는 제방까지 쌓는 등 온갖 노력을 했죠..
아무튼 덕분에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PPINECASTLE
→ 코미 작성자
24.04.20 · 39.♡.79.180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던 거랑 좀 달라서 잡설이 좀 길어져 버렸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아노슈는 신겐 휘하에만 있었던 건 아니고 오미(지금의 시가현)에 있었던 석공집단인데 여기저기 석축 관련해서 많은 활동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코코미
→ PINECASTLE
24.04.20 · 180.♡.243.17
기분이 나쁜 일이 아니죠.. 저 부분은 Finecastle님이 더 전문가인데 그 지식을 나눠주는걸 어찌 싫어하겠습니까. -
PPINECASTLE
→ 코미 작성자
24.04.20 · 39.♡.79.180
항상 좋은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이런 커뮤니티에서 타국사, 특히 일본사는 참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오기 때문에 가급적 쓰지 않게 되버려서 제 성격이 꼬여버린 탓도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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