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까르고 (183.♡.104.94)
2025년 4월 2일 AM 10:59 · 수정됨(12:20)
어제 오전에 작업했던 분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렸던 바가 있었습니다.
"[단상] 작업하다 이제야 선고기일 지정을 알았습니다."
https://damoang.net/free/3491621
이 글을 읽고 @벗님 님이 AI를 활용한 이미지 작업도 하셨었지요.
"'이희경(李喜儆) 선생님'의 사진을 복원해봤습니다."
https://damoang.net/free/3495415

어제는 당시 신문자료를 검색해서 알게된 사실들만 나열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한 감이 있어 이곳저곳을 찾아보니 정리된 자료들이 몇 있었습니다.
이를 살피니까 더 명확해진 부분도 있고,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도 있어 재차 글을 적습니다.
2023년 4월, 나용균, 황기환 님과 함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는데
여기에 적힌 설명이 가장 읽기 편하고 잘 정리된 것 같네요.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8950
{video: https://youtu.be/0Cvj7jxelPI?si=9xGX79B4t4Ipj86a}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의 전개' 부분 생략)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활동의 지원군, 이희경
이희경(李喜儆, 1889~1941)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면 관하리 66에서 태어났다. 순천군 사립 시무학교(時務學校)에서 수학하였고, 1905년 4월경 일본 도쿄 고이카와구 야나기쵸 용전관(龍田館)에 머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
1905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어학을 공부하고, 오하이오에서 보통과 중학과정을 마쳤다. 웨슬리대학에 1년 재학한 후, 1911년에 일리노이대학 의학전문과에 진학하여 1916년 5월 31일 졸업하였다.
1911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 참여하여 임원과 총무를 맡았다. 지방회의 자치제도와 규칙을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916년 6월 하와이로 가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 의료체계 마련에도 기여하였다.
1917년 9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와 평양에 머물던 중 1919년 3·1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였다. 직접 만세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평양·개성·서울로 이동하며 만세시위의 열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외교활동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5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1919. 08)
안창호·서병호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 재건에도 앞장섰다.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10월 대한제국 칙령 제47호에 의해 조직되었다가 1909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적십자사에 통합되었던 단체이다. 발기인 대표로 1919년 8월 29일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대한적십자회 재건을 이끌었다. 회규를 제정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제 확립에 힘썼다. 간호원양성소와 병원 설립도 추진하여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력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해 1919년 10~11월 미국 시애틀·샌프란시스코·워싱턴·로스앤젤레스·시카고 등지의 한인사회를 직접 찾아가 선전·홍보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미주 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이끌어냈다. 대한적십자회 회원 모집과 지부 설립에도 적극 나서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부를 설립하고, 의연금 4,000여원을 모집하여 상하이 본부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의원시찰단(美議員視察團)’이 상하이를 방문하자, 교제위원에 선정되어 외교활동을 펼쳤다. 8월 5일 상하이 아스타하우스 호텔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진정서」를 미국 의원들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실상을 알렸다.
치체린 접견을 요청한 이희경의 서신(1922.03.22.)
1921년 5월 러시아와 외교교섭을 위해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 안공근과 함께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파견목적은 모스크바 자금 문제와 관련하여 한형권의 활동 내역을 파악하고, 임시정부와 러시아 정부·국제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 그리고 이들로부터 자금지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22년 1월경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6개월여 간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3년 1월경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다시 의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베를린대학 부속병원에 근무하면서 호흡기 분야를 전공하였다. 그러면서 독일에 체류하는 한인 유학생들의 실태와 관련 소식을 미국 한인사회에 알렸다.
1924년 미국으로 돌아와 독일에 유학하는 고학생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뉴욕지방 한인들과 함께 구제금을 모집하여 유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1925년 4월에는 서재필(徐載弼)·유일한(柳一韓)·정한경(鄭翰景) 등과 함께 유한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서기로 근무하며, 각종 사무·출장업무를 수행하는 등 회사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29년경부터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2년 여간 미국 뉴저지의 위생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건강 회복 후, 펜실베니아 소재 병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중순 국내로 돌아와 호흡기 전문의로 활동하였다. 서울 인사동에 병원을 개업하고, 언론에 위생과 관련된 글을 게재하는 등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1941년 6월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하 나용균, 황기환 님 부분은 생략)
댓글 (6)
- S
someshine
25.04.02 · 61.♡.87.225
-
에에스까르고
→ someshine 작성자
25.04.02 · 183.♡.104.94
고맙습니다.
어제 썼던 글에 있는 내용인데요, 아이(아들-실제로 출산해 보니 딸)이 미국 시민권자가 되게끔 할 수는 없어서 귀국하였다는 얘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본인이 서거하였기 때문에 해방 후 지인(동료)가 회고하면서 전해줬던 일화였습니다.
하와이에서 개업한지 1년도 못되어 귀국했던 것이 이상했는데, 그런 이유였다는 것이었지요.
미스터 션샤인은 한참 후에, 그것도 유튜브에 조각조각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김희성에게 가장 마음이 가긴 했어요. -
하하세빠
25.04.02 · 203.♡.197.254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에에스까르고
→ 하세빠 작성자
25.04.02 · 183.♡.104.94
고맙습니다. -
노노마드5
25.04.02 · 220.♡.235.8
정말 감사합니다. -
에에스까르고
→ 노마드5 작성자
25.04.02 · 183.♡.123.226
고맙습니다{emo:DINKIssTyle-3d-ang-007.webp:100}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
미스터선샤인 같이 몇 번 봤었는데 제가 좀 더 알았더라면 관련 내용도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을텐데 ㅎㅎ 제 무지가 안타깝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