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나의 첫 요리'
lache

Lv.1 lache (218.♡.103.95)

2024년 4월 22일 PM 12:01 · 수정됨(13:39)

조회 802 공감 0

  박노해 <눈물꽃 소년> 내 어린 날의 이야기 中

 

 나의 첫 번째 요리는 여덟 살 때, 그러니까 그날 정오에, 느닷없이 해버렸다.

 모내기를 앞두고서 동네 일손을 구해 우리 논에 써레질을 하는 날이었다.

 "일손은 잘 멕여아지야. 작은아들, 오늘 나 좀 도와주시제."

 엄니가 뜨끈한 가마솥에 쌀밥을 안쳐두고 매콤새콤한 서대회 감을 손질해 살강(선반)에 올려두는 사이, 나는 동강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찬물에 담가두고, 갯벌 바다가 어부네에 가서 갓 잡은 커다란 갯장어 두 마리를 대바구니에 담아 끙끙 이고 왔다.

 "애썻다. 인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그라. 불티 안 날리게 은근히 때야 쓴다이."

 "걱정 마시씨요. 싸릿가지랑 솔잎으로만 곱다시 불 땔께라."

 엄니는 부뚜막 위에 된장 한 그릇, 조선파 한 다발, 어슷이 썬 무우, 여린 호박잎이랑 들깨 순이랑 토란 줄기, 절구에 굵게 빻은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생강, 부엌 시루에서 기른 숙주 한 바구니를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선 큰 도마를 꺼내 내 다리만큼이나 굵은 갯장어를 다듬고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갯장어가 꿀틀, 한순간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엄니의 손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서리가 치고 난 얼어붙어 버렸다.

 으음, 엄니가 신음을 토하더니 한참이나 감은 눈을 번쩍 뜨고 작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평아, 정신 차리자. 바가지에 물을 떠라. 여기 손에 부어라. 잘혔다. 방에 가 횟대에 걸어둔 옷 내오니라. 이 치마랑 저고리 벗기고 입혀라. 되었다."

 "엄니.... 얼굴에 피..."

 나는 엄니가 쓴 머릿수건을 풀어 후다닥 물에 적셔 이마와 볼에 튄 피를 닦았다. 엄니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랗게 떨려 더럭 겁이 났다. 엄니는 피 흐르는 손을 감싸 위로 치켜든 채 우뚝 서너디 말했다.

 "평아, 내 말 잘 들어라. 물이 끓으면 이 장어를 넣어라. 솥뚜껑이 들썩이고 김이 오르면 여그 된장과 파를 넣고 호박잎과 야채를 넣어라. 마지막에 고춧가루랑 양념을 넣어라. 간을 잘 잡아야 쓴다. 서대회는 고루 잘 무치고 막걸리 식초는 논에 가져가서 마지막에 넣어라. 알겄냐. 다들 일 나갔을 테니 논밭에 가서 작은 엄니나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아라. 엄니가 급한 일로 출타했다 허고 늦지 않게 일손들 밥 내가그라. 알았지야, 평아, 해낼 수 있겄지야?"

 나는 아직 부들부들 떰시롱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라, 다 해낼께라. 근디 엄니 혼자 가실라고라..."

 엄니는 팔꿈치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움켜쥔 채 날랜 걸음으로 마당을 질러 멀리 떨어진 면 소재 의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겁에 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귓속에서 잉잉잉 벌이 날고 가슴에 우두두 말이 달리고 엄니의 피 묻은 얼굴만 아른거렸다.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가마솥이 끓을 때, 엄니가 불러준 순서대로 기억을 불러내며 장어 요리를 시작했다.

 "하이고 하느님, 울 엄니 살려주씨요. 울 엄니가 안 불쌍하요. 아부지 델꼬 가 불더니 울 엄니까지 뭔 죄다요. 좀 살려주시씨요."

 울며 기도하며 엄니가 맡긴 요리를 마쳤다. 그러고는 숨이 차도록 달려나가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았다.

 "누나 얼러 씼으씨요. 바쁘요이."

 나는 논흙투성이인 누나에게 두레박 물을 막 부어주며 재촉했다. 부엌으로 와서 국 맛을 본 누나가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옴마야, 간이 딱 맞네. 맛나게 끓였네잉. 엄니가 한 거보다 평이가 더 맛있게 해부렸네이."

 누나는 속도 모르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 늦겄소. 싸게싸게 챙기잔께라."

 누나와 나는 고봉밥을 담고 김치를 썰고 국통과 그릇을 날래게 챙겨 논가 키 큰 버드나무 아래 밥을 차리고 일손들을 불렀다.

"엄니는 으디 가고 평이랑 순덕이냐?"
"아 공소에 신부님이... 그 눈 파란 신부님이 급하게 불러서라."

 나는 애써 둘러댔다.

 "하야, 귀헌 장어국이네. 나가 오늘 뭔 복이다냐아."
 "하이고야 맛나네. 간도 딱 맞고 입에 착착 감기네잉."
 "흐미, 요 새콤매콤 달근한 서대회 맛 좀 보소. 씨원한 동강 막걸리랑. 이 맛에 나가 여그 살제잉. 아 행복지다."
 "하여튼 니 엄니 음식 솜씨는 천하제일이여."

 나는 엄니가 빈 자리에 마치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나 되는 양 뒷짐을 지고 힘을 담아 말을 했다.

 "맛나게들 많이 많이 드시씨요. 우리 논에 정성 좀 많이 들여 주씨요잉."

 어른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나를 놀리고 순덕이 누나도 "아따아따, 쫌 있으면 장가 보내달라겄다야" 호호호 웃음을 날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마치고 엄니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녘에야 엄니가 핼쓱한 얼굴로 작아져서 돌아왔다.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평아, 이른 대로 했느냐?"
 "예, 걱정 마씨요. 다 잘 되었써라."

 나는 잽싸게 방으로 달려가 요를 펴고 베개를 놓았다. 그리고 핏자국이 말라붙은 옷저고리를 벗겨주었다. 자리에 누운 엄니가 눈을 감고 신음하더니 하얗게 마른 입술로 더듬거렸다.

 "손은 붙였다. 스무 바늘쯤 꿰맸다. 피를 많이 흘려 도중에 어질했으나 다 잘되었다. 감사하다. 오 하느님, 성모님..." 그러고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나는 살금살금 들락거리며 내가 아파 누웠을 때 엄니가 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수건을 적셔 이마의 땀을 닦고 따끈한 물로 발을 닦고 팔 자루를 데워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엄니의 낡은 기도문을 펼쳐 읽으며 울먹였다.

 엄니가 깨어났을 때 솥 안 더운 물 위에 놓아둔 장어국과 밥을 내왔다. 벽에 기대앉아 상을 받은 엄니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많이 컸네..."하셨다. 나는 머쓱한 데다 시린 마음이 들킬세라 "아따 얼른 수저나 뜨씨요" 해버렸다.

 엄니는 따끈한 장어국을 맛보더니, 밥을 말더니, 점점 빠르게 드시는 거였다.

 "맛나네, 잘했네. 아들 밥상을 다 받아보네... 속없이 맛있네."

 밥을 다 드신 엄니는 또 잠이 들었다.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 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

 

이 책의 에피소드로 영화나 드라마 만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 (11)

  • 구름처럼

    구름처럼 Lv.1

    24.04.22 · 1.♡.225.186

    서울살때 박노해님 사진전 새로 바뀔때마다 찾아가서 감상하곤 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네요.
  • m0dn4r

    m0dn4r Lv.1

    24.04.22 · 221.♡.125.6

    와 글이 너무 너무 좋네요. 머리와 가슴과 배가 모두 차는 느낌이에요.
  • 리바

    리바 Lv.1

    24.04.22 · 223.♡.203.191

    다른 사람의 기억이 정말 선명하게 전달되네요.
  • puNk

    puNk Lv.1

    24.04.22 · 1.♡.139.172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젊을적 박노해 시인의 책 진짜 좋아했었는데.
  • lache

    lache Lv.1 → puNk 작성자

    24.04.22 · 218.♡.103.95

    본문에 있습니다만, 최근 출간된 박노해 님의 신간 에세이 <눈물꽃 소년>이라는 책입니다.
  • puNk

    puNk Lv.1 → lache

    24.04.22 · 1.♡.139.172

    아하. 눈물꽃 소년이 책 제목이군요!
    당장 구입해야겠네요.
  • 파이어러 Lv.1

    24.04.22 · 180.♡.252.245

    이분 사노맹으로 잡혀갈때 한마리의 맹수가 우리에 갇히는 느낌이었는데 잘모르시는 분들이 글만 읽으면 상상도 못하실듯합니다. 개인적으로 노동의 새벽 시절 글이 좋은데 본인은 지금이 행복하시겠지요..
  • puNk

    puNk Lv.1 → 파이어러

    24.04.22 · 1.♡.139.172

    노동의 새벽도 좋지만, 그 이후 출소 후 쓰신 책들도 좋아합니다.
    옥 중에서 카톨릭을 받아드리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카톨릭 신앙이 있던 분이셨군요.
  • C

    chekmate Lv.1

    24.04.22 · 122.♡.136.191

    좋아하는 박노해 시인의 글을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사열대키맨

    사열대키맨 Lv.1

    24.04.22 · 58.♡.226.33

    문장 하나하나가 어떻게 저리 맛깔스러울 수
    있을까요! 역시 박노해 시인 답습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