잼 후보 정치력 만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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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1 ippari (104.♡.34.168)

2025년 5월 19일 PM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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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 홍준표에 이어 허은아까지… 어질 어질하네요. @.,@;;;

정치란 한정된 자원의 배분에 대한 합의 과정이죠.

그 과정은 근본적으로 힘에 좌우되지만 일방적인 힘의 행사는 반드시라 할 만큼 반작용을 일으키기에 협의와 조정이 힘 만큼 중요합니다. 

이러한 힘과 협상의 줄타기 속에서 아찔한 균형을 찾는 것이 좋은 정치죠. 


지금 빅텐트에 투항하는 이들은 개인 도덕(모럴) 이 소름끼치게 훌륭하진 않지만, 최소한의 사회 윤리(에틱), ‘염치’는 아는 이들입니다. 

박사모이건 이찍이건 다 본인들은 자신이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좋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누군들 안 그렇겠어요? 사람이 그런 최소한의 자기 긍정 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게다가 우리가 ‘일찍’이라고 모두 성인 군자는 아니쟎아요? 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본인이 죄인이라는데…

역사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선이라 확신하는 자들에게서 끄찍한 악행이 비롯됨을 무수히 봅니다.


우리는 쥐의 시대를 거치면서 최소한의 사회윤리, 염치를 버린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꽤 오래 전, 교수신문이 그 해의 사자성어로 ‘각자도생’을 뽑았을 때 많은 사람이 탄식했죠. 우리 사회가 갈 데 까지 갔다고.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쥐보다 더 한 탐욕에 포악함을 더한 멧돼지가 나라를 망가트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우리가 이찍에 가지는 분노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할 최소한의 염치를 가지지 않는 짐승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함께 살아가야할 이웃 시민에 대한 절망감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내 부모, 형제 조차 어찌 이러한가 하는 절망감이죠. ㅠㅠ

어쩌죠? 이런 비시민들과 계속 살아 가야 하는데?


사람은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면 계속 살아가기 힘듭니다. 자신이 한 행위는 끊임 없이 긍정되어야 하고 그 행위에 맞추어 지금 보고 겪는 일이 재해석되어 과거를 다시 합리화합니다. 

이 구조는 정말 왠만하면 깨기 힘듦니다. 자기 자신의 삶과 세계가 깨지고 부정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어요.

이 구조가 집단으로 작용하는 방식은 상대 집단에 대한 악마화와 공공의 적, 희생양을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집단적 자기 긍정과 승화를 경험하는 겁니다. 가깝게는 조국 선생 가족이 그렇게 사회적으로 살해 당하셨죠.

끔찍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 방식은 우리 인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작동하는 방식이랍니다. 로마 콜로세움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축제에서 오늘 날 왕따 현상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UFC 경가에 희열을 느끼고 리프레시-새로 태어난 활력을 느껴 본 적 있으신가요? 군중 집회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사회의 ’병‘을 치유하는 ‘약‘이래요. 전염병 콜레라의 본 뜻은 ‘분노’이고, (스페인어에서는 지금도 남성여성 표현으로 두 의미 모두 사용), 약-파르마코스의 본 뜻은 번제물(산 채로 세로로 반으로 갈라 불 태운 제물)이라 합니다.


이 끔찍한 살육의 전통은 마치 우리 인류가 벗어날 수 없는 집단적 천형으로까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단단한 구조가 깨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라 믿습니다.

죄의 화신으로 살해되어 마땅한 그 자가 실은 아무런 죄 없는 이웃이었을 뿐이고 나 자신도 언제든지 그런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진실을 대면할 때, 불 같은 분노는 일소되고 축축한 연민의 감정이 차오릅니다.

가난이 죄이고 노동이 부끄러웠던 시대에 스스로 불타오른 한 청년을 만나 그렇게 우리는 변했고,

데모가 죄이고 고향이 부끄러웠던 시대에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 피흘리며 스러진 고귀한 이들을 다시 만나 우리는 변했습니다.


지금 이찍, 우리가 계속 함께 살아가야할 절반의 이웃 시민들은 마찬가지로 그러한 각자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요?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악마여야만 하는 이재명이라는 한 인간을, 이제서야 바로 보게  됩니다.

그 굽은 팔의 참담함과 가난의 설움, 그럼에도 불두하고 이러한 개인적 아픔을 사회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한 청년의 아름다운 결단과 평생에 걸친 경이로운 실천. 친족, 가족, 자신에 대한 끊임 없는 사회적, 신체적 살해 시도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서는 생명력의 눈부심을 이제는 외면하기 힘든 상황이죠.


고액 과외로 꿀 빨던 학벌 좋은 청년들이 대학생 친구 하나를 아쉬워하며 숨을 거둔 또래 노동자를 만나 대학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공장 선배들과 함께 폭도를 욕하던 청년 이재명은 진실을 접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역사 속의 자신에 대해 눈뜹니다.


모든 이찍들이 소름끼치게 훌륭해지진 않겠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번 ‘전향’을 겪고 나면

우리는 다시 최소한의 염치, 사회 윤리를 되찾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니, ‘분노 속에 되돌아 보기’ 보다는 따뜻하게 받아들이자고요.


그런데, 잼 후보 정치력은 무슨 상관이냐고요?

‘열매’를 보세요!


# 희생양 제의(르네 지라르) 개념을 많이 빌려온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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