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아재 (59.♡.98.2)
2025년 7월 12일 AM 12:50 · 수정됨(07:35)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나요?
1980년 아버지가 울산 국영 화학공장에서 쫓겨난 후 저희 가족은 독산동, 신림동에서 주로 살았는데 구로공단과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연배가 살짝 위거나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갔을 때는 제 또래 노동자들을 많이 봤어요. 쪽방 사는 모습도 보고 시흥IC 공터에서 노는 모습도 보고.
그들 어린 노동자만 본 건 아닙니다. 난곡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빈민촌 주변에서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를 목격하면서 살았어요. 노회찬 전 의원이 6411번 버스 얘기를 했지만 예전에 난곡에도 6411번 역할을 하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111번인지 101번인지 헷갈리네요. 이젠 나이가 먹어서. 새벽 첫 차에 사람이 가장 많이 탔죠. 강남으로 가기 위해. 1980년대 다들 그리 잘살 때가 아니지만 난곡이나 구로공단 주변은 유독 못살았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중간에 자퇴하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공장 다닌다고. 그 나이에 학교 그만두면 길이 딱 두 가지죠. 깡패나 도둑 아니면 어느 조그만 공장 노동자. 친구들 중에 그렇게 깡패된 애도 있었어요.
어린 시절 봤던 그들이 소년공 기자회견에서 떠올랐어요. 그런 우리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다들 안다고 생각했지만, 커서 보니 의외로 모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그런 동네에서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사람들을 만나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소위 SKY대학 간 사람 중에 그런 경험이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노동자와 빈민의 삶 자체를 모르는 거니까요) 그래서 소년공 기자회견 보면서 옛 생각에 많이 울었습니다. 물론 아버지 생각도 하면서요.
저는 비록 아버지가 공장에서 쫓겨난 후 다 쓰러져가는 연립주택이나 물에 잠기는 반지하집에 살기는 했어도 아버지 덕에 4남매가 모두 대학을 갔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내 자식들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다짐을 하고 몸을 갈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빽도 사돈에 팔촌까지 어디 돈 몇푼 빌릴 데가 없던 아버지가 느꼈을 공포, 슬픔 같은 건 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재명 대통령같이 공장에서 일을 했어야 했겠구나 싶어요.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죠. 저런 어린 노동자 보면서 너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아버지는 당신이 노동자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셨어요. 적어도 노동으로 정직하게 돈 벌면서 살았다 이겁니다.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우리 주변을 돌이켜보면 공장 노동자 출신을 쉽게 만날 수가 없습니다. 70년대, 80년대 공장 취직하기도 어려워서 공장 노동자 출신이 드물어요. 물론 노동자도 대기업 노동자인지 중소기업 노동자인지 차이는 있겠지만요. 영세공장 들어가는 건 기피했으니 또 그런 노동자 보기도 힘듭니다. 저 대학 갈 때 공장 노동자 출신 아버지 둔 게 주변에 저 하나였습니다.(공장 노동자만이 노동자다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귀한 대통령을 맞이한 겁니다. 그건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정말 없으니까요. 그러기에 노동자의 삶에 대해 가장 잘 알겠죠. 결코 잊지말고 노동자와 약자를 위해 노력해주실 것을 요청 드립니다.
댓글 (2)
-
PPWL⠀
25.07.12 · 221.♡.221.16
101, 111, 119 모두 난곡이 종점이었습니다. -
홍홍성아재
→ PWL⠀ 작성자
25.07.12 · 59.♡.98.2
119번도 있었죠. 세월이 지나니까 까먹어요. 정확히는 기억력이 워낙 안좋은거지만.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