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kdoo (211.♡.151.159)
2025년 7월 27일 PM 12:44 · 수정됨(14:01)
첫 글이 장문의 글이라 송구스럽네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 올라온 〈열대의 아포칼립스〉는 2019년에 공개한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의 속편 같은 작품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를 이어서 보고 있자면, 마치 한국 사회의 절망 버전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위태롭기 때문이고, 그 위기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이 두 작품이 아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예전에 〈위기의 민주주의〉를 본 다음 정리한 글을 문장 몇 부분만 수정한 다음 ‘덧붙임’을 추가한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책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는 정치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하네요.
위기의 민주주의, 2019 - 페트라 코스타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두 대통령 룰라와 지우마가 어떤 방식으로 검찰과 언론에 의해 탄핵당하고, 감옥에 갇히는지를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러니 〈위기의 민주주의〉는 일종의 몰락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죠. 또한, 제목이 드러내듯이 이 몰락은 민주사회의 몰락을 말합니다. 룰라와 지우마를 악마화하는 데는 모루라는 이름의 연방 검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일명 ‘세차 작전’이란 조사를 통해 석유 시추 사업의 비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비리와 지우마를 교묘하게 엮어 넣지요.
검찰이 고발한 지우마의 위법 행위는 석유 시추 사업 비리가 아니라 정부 회계 부실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비리 사건에 지우마의 이름을 연결해 마치 지우마가 엄청난 비리를 저지른 것처럼 몰아갑니다. 언론은 기사를 쏟아내고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SNS를 통해 지우마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를 토해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자극한 것은 경기 침체입니다. 지지율은 추락하고, 지우마는 브라질 역사의 가장 큰 죄인으로 낙인찍힙니다. 그리고 야당은 탄핵을 추진합니다. 탄핵 추진의 사유는 비리이나 탄핵 심판 의제는 부실한 회계 문제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죠.
이제 다음 타깃은 룰라입니다. 검사 모루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아파트 한 채가 부정한 방법으로 룰라의 소유가 됐음을 폭로합니다. 모루는 룰라가 이 아파트를 소유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웁니다. 소유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부정 취득한 아파트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죠. 멀리 떨어진 한국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잠시 돌이켜 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호화 요트를 보유했었다고 믿는 사람은 여전히 많습니다. 사실과 믿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경제가 무너지고 삶이 힘들어졌을 때 검찰과 언론은 사람들에게 광분할 대상을 던져줍니다. 그 이후 룰라는 지지자들이 반대함에도 자진해서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사태가 2016년에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미 2009년에 겪은 일이죠. 브라질의 다음 대통령은 자이르 보우소나루라는 자입니다. 과거 독재 정권을 찬양하는 자이자 극우 권위주의자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자입니다(다큐멘터리 〈열대의 묵시록〉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자의 행동이나 발언은 내란 수괴 윤석열과 대부분 일치합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놀랍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한국 사회가 브라질처럼 변할 수도 있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도했었고, 여전히 그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만든 페트라 코스타는 수없이 많은 피와 희생으로 세운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현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경제적 위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요? 민주주의는 우리가 늘 입에 올리는 단어지만, 실은 정의하기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게다가 학자에 따라 개념 규정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합친 단어죠(democracy와 republic은 각각 ‘시민의 힘’과 ‘시민의 일’이라는 뜻으로 같으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민주공화국의 형식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헌법 제1호에서부터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규정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시민(특정 권리)에서 오늘날의 국민(한 국가의 보편 권리)으로 규정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큰 구조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죠. 정치 형태는 민주주의면서 경제 형태는 자본주의입니다. 이 두 구조를 각각 설명하는 문서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가장 간결하면서도 탁월하게 설명한 것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입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자본주의야말로 혁명적인 구조라고 주장합니다. 사태의 변화에 따라 구조 자체를 수시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 시기의 자본주의와 오늘날의 자본주의 그리고 브라질의 자본주의와 한국의 자본주의는 서로 같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각각 다른 삶의 양식에 맞추어 변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구조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바꾸려는 이익 세력이 존재하게 됩니다.
민주주의 역시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혁명적이건 개혁적이건 지속적인 변화에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입니다. 이를 설명한 책은 매우 많지만, 여기선 이 과정을 아주 간략하고 뚜렷하게 정리한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를 참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개혁은 솔론에서 시작한 농지 개혁입니다. 농지 개혁은 토지의 소유 변화를 가져와 시민을 늘리게 됩니다. 그런 다음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지주만이 아니라 상인과 수공업자도 시민이 됩니다. 이런 과정은 점차 자본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동력만 쓸 수 있는 사람(로마 시기에 이를 poletarius라고 하며 ‘프롤레타리아’의 기원이 됩니다)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민의 확대로 인해 민주정이 등장해 민주정의 정점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페리클레스 시대까지 70여 년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민주정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제적 문제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농경 사회입니다. 왕과 지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죠. 여기서 솔론의 농지 개혁은 철학자 솔론의 이상론적 개혁이라 치고 넘어갈 수 있으나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로부터 이어져 아테네의 몰락에 이르는 페리클레스 시대까지는 전쟁과 해적 행위를 통한 수익 증대를 노리는 경제 중심적 사고가 시민 세력의 성장을 견인하고 또 몰락으로 이끌게 됩니다. 전쟁과 전쟁 특수는 중장보병을 구성하는 시민 세력의 증대를 요구했고, 늘어난 시민 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요구하며 또다시 사익 추구를 위해 사회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이 고대 그리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는 사회적 이상론과 특정 지도 계층의 탐욕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오늘날과 사뭇 다릅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절정기에 그 사회를 지도하는 인물이었던 페리클레스는 유명한 두 편의 전몰자 추도 연설을 남겼습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그는 먼저 이루어진 연설에서 그리스의 민주주의와 시민을 찬양한 다음, 죽기 직전 이루어진 연설에서는 그리스가 실은 참주정과 마찬가지인 상태라고 말합니다.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민주주의의 한계를 이야길 할 때 시민사회의 잘못된 선택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위기의 민주주의〉 역시 검찰과 언론에 휘둘리긴 했으나 어쨌건 시민사회의 잘못된 선택이 이야기의 한 축을 차지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민주주의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면, 우린 어떤 정치 체제를 고민해야 하는가가 문제시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통해 그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아테네의 신이 아닌 다른 신을 들여왔다고 고발당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판결 내용은 대략 유죄 280표, 무죄 220표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과 사형 집행을 피할 몇 가지 방법이 있었음에도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받아들입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사형을 판결받은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유죄를 판결한 이들을 “아테네인 여러분!(38c)”이라고 부르면서 무죄를 판결한 이들은 “재판관 여러분!(40a)”이라 표현합니다. 유죄를 판결한 이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죠. 그러나 무시는 무시일 뿐 소크라테스는 사형 집행에 침착한 태도로 임합니다(이 과정은 플라톤의 『파이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과거 소크라테스를 호명할 때 등장하는 경구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악법도 법이다”는 라틴어로 "Dura Lex Sed lex" 라고 합니다. 이는 로마 민법의 격언으로 판결이 비통스럽더라도 법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는 법 집행에 강조점을 둔 것이지 법 자체가 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플라톤이 쓴 글을 모두 읽다 보면 악법에 관해 논의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여러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악법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악법도 법이긴 하지’ 정도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일지라도 공동체의 합의였기에 따른 것이지 그 법 자체를 ‘옳은 것’으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자들을 향해 ‘재판관’이 아니라 “아테네인 여러분!”이라고 부른 순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법을 부정한 것일뿐더러 자신의 죽음을 통해 법이라 칭할 수 없는 악법의 폐지를 요청한 것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사형을 택함으로써 공동체의 룰은 받아들였으나 그의 태도를 통해 악법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지지자들이 거세게 반대함에도 스스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간 룰라의 모습이 겹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의회에서 계단을 청소하시는 분이 “민주주의란 건 사실 존재하지 않잖아요”라고 한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말이 민주주의의 핵심을 짚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1960년대 이후는 한국 사회는 물론이고, 다른 서구 사회 역시 뭔가 명확한 듯하지만, 짙은 안개처럼 본 모습을 가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실체를 존재하게끔 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명확한 실체를 모른다는 것, 실체를 만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다는 것, 그 과정에서 불명확한 실체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혁명적 특성을 지닌 민주주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변화를 거치는 민주주의는 그 혁명적 성격 때문에 보다 뛰어난 사회 체제를 만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에 극단적으로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스스로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독재 정권과 싸워 왔던 강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독재 정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다소 말장난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독재 정권 시기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시기이기 때문이며, 싸움 끝에 어떤 정치 체제가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정치가 부재하는 준 전쟁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이 과정을 겪은 다음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민과 시민의 싸움과 다툼입니다. 이 싸움과 다툼에는 수많은 것이 들어갑니다. 그렇기에 여러 정당 또한 탄생합니다. 이러한 다툼과 함께 민주주의는 시민과 무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를 참고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에게 있어 최선의 상태를 ‘무지의 지(智)’라고 규정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상태죠. 이에 반하는 상태는 ‘무지의 무지’입니다. 자신이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안다고 으스대는 상태, 즉 오만(『티마이오스』 주석에서는 오만(hubris)의 의미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우리가 시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침해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기도 합니다)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말합니다.
오만한 인간은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여기므로 대화를 거부합니다. 소통과 다툼 그리고 설득을 통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와는 대립하는 상태의 인간인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인간일수록 신적인 권력, 독재 권력을 추종하게 됩니다. 모든 걸 안다는 인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태도야말로 실은 힘만을 추종하는 노예적 오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만한 자들을 소크라테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소크라테스의 변론』 17a)’로 규정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의 무지마저 과시하며 오로지 탐욕만을 추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힘은 경제력, 곧 자본의 양으로 결정됩니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는 한 국가의 경제적 행위를 그 국가 내의 행위를 통해 규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힘을 추종하는 오만함은 한 국가의 경제력 독점과 이를 통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여기에 많은 사람이 넘어갑니다. 독재였지만, 80년대 한국은 잘 살았다는 논리가 이러한 힘 중심의 오만함에서 기인합니다. 당시 피를 쏟고 뼈를 갈며 일했던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태도지만, 이들에게 돈 없는 사람은 그저 노예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추악한 태도를 그들은 ‘진실’이라고 말하죠(바로 이러한 태도에서 그들이 말하는 ‘자유’ 개념이 다져집니다. 그들에게 자유란 나만 자유롭게 지시하고 명령할 권리, ‘나’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시민을 노예처럼 부릴 권리, 즉 무한정한 사익을 추구하는 일부 세력만의 제한 없는 권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제시하는 브라질의 상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된 상태입니다. 단지 룰라나 지우마가 무조건 옳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검사들과 판사들이 법을 교묘히 이용하고, 언론이 부당한 방법으로 시민사회의 대변자를 범죄자로 만들어 냈으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즉각적인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권력의 입만을 바라보며 근거를 알 수 없거나 지극히 사적인 분노를 공적으로 가장된 것으로 만들어 토악질해대는 행위는 단지 나치 시대의 독일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튜브에 널리 퍼져 있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떠올린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판단하는 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시민사회가 세력을 이뤄 싸우고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사회끼리의 다툼은 건강한 상태입니다.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겁에 질려 있습니다. 검찰이 그렇고, 판사가 그렇고, 언론은 증오스럽습니다. 그리고 이 배후에 거대한 부와 세력을 거머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강대한 세력을 지닌 권력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이 자들은 전두환 같은 독재 권력과 학살을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민주주의의 적이 민주사회의 멱살을 쥐어 잡고 뒤흔드는 형국인 것이죠.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아주 약해질 수도 있고, 크게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변화일지라도 독재 권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변화 가능하지만, 독재 권력을 변화시키려면 엄청난 피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변화 불가능의 상태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과 내 친구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사랑할 지금과 이후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라도 결코 독재 권력을 꿈꾸는 세력이 사회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임 1 — 보통 프롤레타리아와 대립하는 집단으로 부르주아를 듭니다. 이는 마르크스 이후 근대에 나온 개념 규정입니다. 본래 프롤레타리아, 즉 프롤레타리우스와 상대되는 규정은 클라시쿠스(classicus)입니다. 이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로마에 함대(classis: 여기서 클래식(고전)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본래 클라시쿠스는 사회를 지킴으로써 평범한 시민인 프롤레타리우스 또한 이롭게 하는 이들입니다. 고전(古典)은 시민을 살찌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덧붙임 2 —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남긴 마지막 말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 해설들과는 살짝 다른 해석을 해보고자 합니다(이 해설은 적어도 번역된 모든 플라톤 저작에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다른 책에는 있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갚게나, 소홀히 말고”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입니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었던 신이죠. 소크라테스는 평생 아테네 폴리스(공동체)를 위해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평생 ‘훌륭한’ 공동체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하나의 가정(집)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또 다르게는 하나의 신체로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계속 이어져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 폴리스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시민사회이고, 이 시민사회에는 분명 병들고 썩은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한 개인의 병과 상처는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의사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병든 공동체는 어떨까요.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언급한 것은 분명 ‘신의 뜻’을 말한 것이 아닐 겁니다. 그는 스스로가 평생을 공동체에 바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의 마지막 말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갚게나, 소홀히 말고”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슬프고 괴로운 사태를 겪을 테지만, 그래도 절망하여 공동체에 눈을 돌리지 말고, 시민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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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윤사모
25.07.27 · 124.♡.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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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랑비
25.07.27 · 223.♡.243.62
스크랩하였고, 차분히 읽어보겠습니다. -
사사막여우
25.07.27 · 223.♡.178.43
이념으로 접근하면 어렵죠.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이
'다함께 사람사는 세상'으로
알기쉽게 표현하신거죠.
대한민국에서 '민주공화국'의 의미는
'다함께 사람사는 세상'입니다. -
Mmi_ritrovai
→ 사막여우 작성자
25.07.27 · 211.♡.151.159
네, 노무현 대통령께선 "다함께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우리가 늘 바라왔던 이념을 내세우셨지요('엘리트 특공대'라는 1978년 영화에서 '다함께 사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라는 대사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함께 사는 방법이야 말로 어려운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글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소소한 이념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데아에서 온 이념은 결국 '우리가 지양해야 할 곳'을 뜻하기에 그에 관한 글을 적어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정 집단의 특수 이론을 뜻하는 '이데올로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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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하신 노무현 대통령
이 두 분이 일깨워주셨던 내용을 실천하는 국민들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음을 내란상황 수습과정에서도 다시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