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유공자의 이야기
시커먼사각

Lv.1 시커먼사각 (49.♡.218.16)

2025년 8월 23일 PM 11:45 · 수정됨(08. 24. 16:51)

조회 2,372 공감 0

'그'는 유복하다고 할 정도의 경제력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충분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고 아내와의 사이에서 몇명의 자식을 둔 행복한 가장이기도 했습니다.

해방을 몇년 앞둔 어느날 의열단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조달을 위해 인근 동네로 잠입해들어왔다가 접선에 실패했고, '그'는 독립운동가들과 관계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을 숨겨주었다가 탈출시킵니다.독립운동가들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는 뒤늦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룹니다.

해방 전까지 '그'의 집안은 풍비박살이 났고, 친인척들과 처가와의 교류는 물론 친구들과의 인연도 거의 끊어집니다. '그'는 건강이 상한 몸으로 해방을 맞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아내는 친정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어렵게 아이들을 키웁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가족은 의열단 계통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그'의 행적을 알리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한 채 어렵게 살지만 다행히도 '그'의 자녀들은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고학을 해가며 어렵게 교육을 받고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그'의 손자, 손녀들을 낳고 키웁니다. '그'의 아내는 손자, 손녀들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손자, 손녀들의 외할아버지인 '그'의 이야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번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의 자식들도 (아마도 두려움 때문이었겠지만) 리승만의 정권과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의 시절에 '그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후에도 그가 세상을 떠난지 반백년이 훌쩍 지난 김대중 정부시절이 되어서야 '그'의 이야기가 다른 경로를 통해 발굴되고, 이미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다른 이들의 증언으로 확인이 되어 '그'는 독립유공자 명부에 등재됩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후였고, 인연이 끊어진 친인척들과 친구들은 소식도 전하지 못합니다. '그'의 자식들도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거나 세상을 떠난 후라  '그'의 이야기는 빛바랜 문서로만 남고, '그'의 자식들의 말년에야 '그'의 행적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그'의 손자, 손녀들에게서 '그'의 증손자, 증손녀에게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집니다.


이제 '그'의 아들딸들도 전부 소천하셨기에 '그'의 기일인 8월이 가기 전에 다모앙에나마 소회를 남깁니다.



제 외조부님의 이야기라... 쓸까말까 망설이다 썼는데... 너무 감상적인 글이라 곧 폭파할 수도 있습니다.

댓글 (13)

  • 가랑비

    가랑비 Lv.1

    25.08.23 · 58.♡.137.93

    너무 늦었지만, '그'의 이름 석자가
    다모앙에서라도 불리어지면 좋겠습니다.
    '그'가 듣지 못하고,
    '그'의 아들딸도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고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 .
  • 달과바람

    달과바람 Lv.1

    25.08.24 · 222.♡.51.214

    외할아버님 같은 분들 덕분에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emo:damoang-emo-039.gif:120}
  • 이루리라

    이루리라 Lv.1

    25.08.24 · 58.♡.94.201

    시커먼사각님의 그들응 향한 분노는
    이렇게 뿌리깊은 것이었네요.
    영웅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시커먼사각

    시커먼사각 Lv.1 → 이루리라 작성자

    25.08.24 · 49.♡.218.16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나서도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분의 행적을 알게되었고 낡고 빛바랜 단체 사진에서 이목구비도 제대로 구분이 안되는 모습을 뵈었을 뿐이라... (격세로 전해지는 유전적인 영향이 없다면)그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성향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대신 그분의 행적을 알게 된 다음 어렸을 때의 의문이었던 왜 남들은 다 있는 외할아버지가 안계실까에 대한 의문이 풀렸고, 돌아가신 외가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 안쓰러움(?)이 더 깊어지더군요.물론 '그분'의 증손녀는 부끄럽다고 남들에게 얘기하진 않지만 매우 자랑스러워하긴 합니다.
  • 호호바 Lv.1

    25.08.24 · 211.♡.20.19

    지난달에 국중박에서 광복 80주년 전시를 보았는데 일본군의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민간인 사찰 카드 같은 것이 전시되어있더라고요. 우리가 아는 또는 어느 곳에 이름을 올린 독립군 외에도 너무나 많은 조상님들께서 양심을 갖고, 여력이 닿는데로 독립을 위해 힘쓰다 괴롭힘을 당하셨겠구나 실감이 났습니다. 눈물이 저절로 흐르더라고요.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고요.

    이런 이야기는 많이많이 해주세요. 우리가 당연히 알고 기억해야 하는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 하양이 Lv.1

    25.08.24 · 67.♡.226.51

    폭파하지 마세요. 널리 퍼뜨리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고 기억해야죠.
  • twomix

    twomix Lv.1

    25.08.24 · 182.♡.24.37

    기억되셔야 합니다..
    늦었다 하더래도 그분의 기억이 집안에서 그리고 국민들에게서 기억되길 바랍니다.
  • S

    sltx Lv.1

    25.08.24 · 112.♡.237.91

    자랑스러운 집안이시네요. 잊혀지지 않게 글로 남겨서 자손들에게 남겨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초보아찌

    초보아찌 Lv.1

    25.08.24 · 118.♡.80.106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외조부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친일매국을 단죄하지 못해 제대로 된 보상을 못하고 그렇게 지내왔네요.
  • 지혜아범

    지혜아범 Lv.1

    25.08.24 · 112.♡.93.78

    좋은 일은 널리 알려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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