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긴 농담...
aicasse

Lv.1 aicasse (172.♡.79.216)

2025년 9월 21일 PM 01:27 · 수정됨(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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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연수 42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고, 그럴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조금만 비틀어 보죠.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수학자들은 대체로 그런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해 그다지 세련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많은 수학자들은, 일단 그런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누가 ‘그래서 존재한다는 게 뭔데’라고 물으면 그제서야 수학적 대상이 일종의 플라톤적 이데아 세계에 존재한다고 막연하게 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다소 순진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머릿속으로 늘상 다루는 자연수와 같은 보편적 관념이 그렇다고 어떤 객관적인 존재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좀 거시기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단 수학적 존재들은 그것이 물리적 세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하여튼 어떤 형태로든 객관적인 존재성을 갖는다고 간주해봅시다.



자, 우리는 오늘날 흥미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보편인공지능이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거대언어모델은 아직까지는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고, 보편인공지능이 실제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과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에,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생각, 인간의 감정,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 고기로 구현된 일종의 컴퓨터라는 생각이 이보다 더 구체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 오늘날과 같이 한 사람이 컴퓨터를 여러 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절에는, 컴퓨터라고 하면 뭔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기계를 떠올리게 됩니다만, 기실 물리적인 컴퓨터가 있기 이전에 이미 이론적인 컴퓨터가 있었습니다. 튜링 머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로 흔히 불리우는 튜링은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 짧은 생애에 매우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중 아마도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바로 ‘계산이란 무엇인가’,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컴퓨터란 무엇인가‘를 최초...라고 하기는 아주 살짝 그렇지만, 어쨌든 최초에 가깝게 엄밀하게 정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알론조 처치의 람다 컬큘러스, 괴델의 recursive function theory 등이 있긴 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튜링의 ‘튜링 머신’(물론 튜링은 그 기계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만)을 이론적인 컴퓨터의 시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처치의 모델이 매우 프로그래밍 언어적인 해답, 괴델의 모델이 매우 수학적인 해답이었다면, 튜링은 매우 ’기계적인’ 모델을 통해, 계산이란 무엇인가, 계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직관적이면서도 엄밀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튜링 머신은 매우 구체적인 물건입니다. 유튜브를 뒤져 보면, 튜링 머신을 레고 테크닉 세트를 이용해서 구현해놓은 것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다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컴퓨터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어쨌든 분명히 매우 구체적이고, 정말로 원한다면 어쨌든 실질적인 구현도 가능한, 그런 실제적인 컴퓨터임은 분명합니다.


동시에, 튜링 머신은 엄밀한 수학적인 대상이기도 합니다. 원래 튜링이 튜링 머신을 개발한 이유 자체가 계산한다는 것을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튜링 머신은 기본적으로 수학적으로 쓰여진 매우 단순한 구조의 컴퓨터입니다.



아마도,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자의식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컴퓨터를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소위 처치-튜링 논제에 의하면, 그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기계를 만든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쨌든 튜링 머신을 통해 그러한 기계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젠가는 그러한 자의식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를 튜링 머신을 통해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튜링 머신이란 기본적으로 수학적인 대상입니다. 그리고 수학적인 대상은 객관적인 존재성을, 음, 아마도 어떤 플라톤적 이데아 세계에서, 갖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학적인 대상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참, 우리는 ’언젠가는‘ 그러한 튜링 머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학적인 대상이 객관적인 존재성을 갖는다면, 그러한 튜링 머신은, 우리가 그것을 언젠가 발견할 것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해야 합니다. 수많은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는 수학적 대상들이 있고, 우리가 이들을 먼 미래에 만날 것인지와 무관하게, 이들은 이미 그 자체로 수학적 대상들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저의 모든 기억과 사고와 영혼을 덤프해놓은 ’튜링 머신 버전‘의 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학적 대상으로서, 그 제 자신의 튜링 머신 버전은, 제가 그 코드를 실제로 입수해서 만져볼 수 있느냐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와 저의 튜링 머신 버전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혹시 이데아 세계에 살고 있는 튜링 머신은 아닐까요?

댓글 (5)

  • Rider_man

    Rider_man Lv.1

    25.09.21 · 115.♡.22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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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과바람

    달과바람 Lv.1

    25.09.21 · 121.♡.91.33

    터미네이터는 이미 실현 가능해진 것 같고, 블레이드 러너와 공각기동대가 현실이 될까요.
    결국 매트릭스 속에서 꿈꾸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죠.
    크크.
  • 정사의신

    정사의신 Lv.1

    25.09.21 · 68.♡.60.217

    저는 처음에는 영혼이란 그저 뇌가 만들어내는 감정과 기억과 사고 호르몬의 실체가 없는 결과물이다 라는 생각이었지만 어느 실험에서인가 사람이 죽은 이후 미세한 양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가리켜 영혼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을 보고 흔들렸습니다. 영적인 세계가 있다면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초월적인 존재도 있는게 아닌가?

    그러다가 말씀하신 영혼과 감정과 인간과 같은 사고능력을 가진 안공지능 개발이 가시화 되면서 다시 또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감정도 결국 구현 가능한 메카니즘이고 영혼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같은건가보다.

    그러다가 또 우주를 생각해 보면 저건 도저히 생명체가 구현해 낼 수 없는 비상식적인 실재인데 그러면 이거야말로 신이 있다는 증거 아닌가

    외계인이라도 빨리 나타나서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왠지 죽기전엔 한번 볼것 같아요
  • 매일두유

    매일두유 Lv.1

    25.09.21 · 219.♡.171.27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와는 정의들이 좀 다르기에 써봅니다.

    튜링머신으론 영혼을 제작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모든 변수를 안다면 모든 미래를 예측 가능하다는 이론은 양자역학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정론의 시대는 끝났고
    퀸텀브레인에 보면 우리의 선택이 오히려 슬릿의 확률중첩 상태와 같다고 말합니다.

    수십억년에 걸쳐 진화하며 파충류의 뇌부터 시작되어 생성된
    의식과 자기와 무의식과 페르소나와, 컴플렉스와 집단 무의식과 외부적 문화와 리비도의 생명의 힘들 등
    추상해서 영혼이라고 하는 이 복합체는 아직 잡기에 너무도 먼 무언가입니다.

    '저편' 또는 이데아 라고 하는 칸트적, 플라톤적 설명은 우리가 겸손해야할 이유를 알려주기에
    저도 좋아합니다.

    저는 칼융적인 세계관에서 사는데요
    융은 말합니다.
    예술, 또는 상징 이란 우리가 보거나 느낄수 없지만 그곳에 있는
    ‘저 편’ 이데아의 무언가를 표현하기위한 끝없는 노력이라고 합니다.

    마크 로스코가 생각나는 인물인데
    “저 편’ 이데아 를 잡기 위해 노력한 예술가이며
    그의 작품을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이 많습니다.

    도스토옙스키를 계속 읽으며 작가적인 관점에서 신과 영혼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찾고 있어서
    나름 관심분야라 써봤습니다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군요 하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길벗

    길벗 Lv.1

    25.09.21 · 79.♡.183.251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거의 모든 일은 전자기력입니다.
    전자의 위치바꿈으로 자의식, 생각이란 프로세스를 만들기도 하고요.
    인간이란 여타 대다수 생물과 다르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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