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tant79 (61.♡.152.133)
2025년 9월 29일 PM 03:00 · 수정됨(09. 30. 00:22)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의 자랑인 조선왕조실록은 사실 왕조 전기의 기록이 모두 소실될 뻔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실록을 중앙의 춘추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충주, 전주, 성주에 수장고를 만들어 보관했습니다. 이것을 "사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사고들이 위기에 처합니다. 성주, 충주, 춘추관이 일본군의 진격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의 사본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게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안에 있는 전주사고 수장고입니다.
경기전을 방문했을 때 문화해설사님이 여기 보관돼 있던 국가 기록물을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셨습니다.
1592년 5월, 한 달 전 쳐들어온 일본군의 위협이 전라도까지 손을 뻗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전주사고 관리자인 참봉 오희길 등 관계자들을 불러서 기록물을 지켜낼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특히 수장고가 있던 경기전의 문서 중에는 태조 이성계의 진영 어진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관찰사의 명령을 받은 오희길은 기록물을 전주에 두어서는 유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기록물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관의 인력으로는 1,000점이 훌쩍 넘은 문서를 도저히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전라도 곳곳의 사대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에 응한 것이 정읍의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유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64세와 56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부름에 응했습니다.
이들은 전재산을 팔아 30명의 인부를 고용해서,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태조어진 등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총 1368권의 국가 서적을 전주에서 내장산까지 운반했습니다. 궤짝이 60여 개나 돼서 나이 불문하고 짊어져야 했습니다.

지금은 등반로가 잘 닦여 있지만, 당시 용굴암은 해발고도 800여미터의 내장산에서도 40여 미터에 달하는 수직 절벽에 있던 동굴이었습니다. 안에서 밖은 보이지만, 반대로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는 위치였죠.
한 달에 걸친 여정 끝에 이곳에 도착한 안의와 손홍록 일행은 기록물이 든 궤짝을 7평 남짓한 작은 동굴에 내려놓고 한숨을 돌렸습니다.


말이 동굴이지 바위 틈에 생긴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온몸으로 궤짝을 덮어야 하는 곳이었죠.
문서들이 참화를 입는 건 일단 막았지만 외진 산속에 들어온 일행은 전황을 파악하기가 오히려 어려워졌고, 매 순간 일본군의 습격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안의와 손홍록은 내장사 스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매일 번갈아 용굴암에 올라 문서를 지키게 됩니다. 전라도 쪽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온다는 얘기가 들릴 때마다 더 깊은 비래암과 은적암으로 궤짝을 옮겨가면서요.
이때 그날의 담당자가 문서 보관 현황을 매일 동굴의 일지에 남겼는데, 이 일지가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교대 경비 일기"라는 의미의 "수직상체일기"입니다.

당시로썬 이미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던 어르신들이 무려 370일 동안, 무더위와 혹독한 추위, 굳은 비바람을 견뎌 가며 써내려간 기록입니다.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 52일, 안의 혼자 수직한 일수 174일, 손홍록 혼자 수직한 일수가 143일입니다.
이렇게 지켜낸 국가 기록물은 1년 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일단 정읍으로 옮겨졌고, 다시 해주로 옮겨졌다가 사본 제작을 위해 1596년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집니다. 안의와 송흥록은 이때까지도 동행했는데, 노령과 모진 수직 생활을 이기지 못한 안의는 강화도로 향하는 길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홀로 남은 손홍록은 강화도에서도 실록 보존을 이어갔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묘향산으로 실록을 옮겨 변함없이 당직을 서다가 왜란 직후인 1600년 숨을 거둡니다.
왜란 이후 이 문서들은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병자호란의 참화와 효종 대의 화재를 견뎌내고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함께 합니다. 이후 일제에 의해 규장각으로 옮겨졌다가, 1928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실록이 바로 원래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입니다.

해설사님 말씀이, 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나 의병도 잊지 말아야겠지만, 국가 기록물을 지켜내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이름 없는 조상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책임이 없었지만 국가의 부름에 기꺼이 응한 안의와 손홍록
일본에 넘기지 않아야 된다는 말에 뭔지도 잘 몰랐을 궤짝을 등에 지고 전쟁통에 가족을 떠나 길을 나섰던 30여명의 짐꾼들
걸리면 절이 피해를 볼 수 있었지만 실록을 지키는데 아낌없이 도움을 줬던 승려들
그리고 내장산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도움을 줬던 이름 없는 민초들
모두 후손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분들이라고요.
주말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고를 보고 여름에 전주 방문했을 때의 일이 떠올라서 써봤습니다.

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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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이아빠
25.09.29 · 118.♡.73.53
와.. 몰랐던 내용입니다. 진짜 대단합니다. -
RRider_man
25.09.29 · 180.♡.225.117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이겨야하는 민족이죠!!!! -
66미리
25.09.29 · 218.♡.67.124
지금 생각하면 64세와 56세는 별거 아닌거처럼 생각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평균 수명 45세 정도였습니다.
60세 환갑은 사람들이 기적이라 여기며 마을 잔치를 하는 정도의 큰 경사이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문서를 이고지고 척박한 산 위에 올라가서 없어진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만큼 급박한 왜란의 상황에서 지켜낸거죠. -
Hheltant79
→ 6미리 작성자
25.09.29 · 61.♡.152.133
아마 장정들은 다 징집돼서 저분들이 나서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야말로 여생은 포기한 발걸음이었겠죠. -
달달과바람
25.09.29 · 14.♡.23.236
저도 이런 내용은 처음 들었습니다.
좋은 이야기 고맙습니다.
{emo:damoang-emo-039.gif:120} - H
HyoGoon
25.09.29 · 39.♡.231.85
조선시대 때 우리 조상님들은 이미 데이터 분산 백업의 개념을 알 뿐만 아니라 그걸 직접 실천했던거죠. - 하
하나둘셋넷다섯여섯
25.09.29 · 118.♡.84.245
흥미롭습니다.
각색 잘 하여서 천만흥행 영화가 되면 좋겠네요 -
까까망꼬망
→ 하나둘셋넷다섯여섯
25.09.29 · 61.♡.120.114
진짜 이런건 영화화해서라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
은은비령
25.09.29 · 175.♡.75.77
전주사고의 실록을 피신시킨것 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위험한 상황속에서 돌아가며 당직까지 섰다는것까지는 몰랐는데, 참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저 분들 덕분에 수백년 후에도 후손들이 그 기록을 연구할수 있게 됐네요. -
Bboolsee
25.09.29 · 211.♡.80.125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록 덕후 우리 조상님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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