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426 (39.♡.223.199)
2025년 10월 14일 PM 11:54 · 수정됨(10. 15. 07:31)
97년에 베트남 여행을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환상 같은게 있었거든요.
환상과는 달랐지만, 베트남은 매력적인 곳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거리에 다니는 사람 중에 화난 표정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가난하지만 뭔가 사람들이 희망에 차 있고, 관광객들에게 비굴하게 과잉 친절을 보이는게 아니라, 당당하게 밝고 친절하다고나 할까요? 덤으로 거기서 쌀국수 중독에 걸려 돌아왔습니다.
캄보디아는 2004년인가 2005년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옆 나라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더군요. 사람들이 모두 표정이 없고 의욕도 없고 눈에 초점마저 없는 것 같았습니다.
크메르 루주가 90년대 말에 가서야 완전히 해체됐고, 그들이 권력을 잡았던 이래 20년 이상 캄보디아는 교육도, 문화도, 사회 시스템도 완전히 붕괴되었으니 그리 된 거겠지요.
음식점도 태국 사람들이 와서 장사를 하는 거고, 씨엠립의 찬란한 사원 유적 말고는 보여줄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통 공연이라고 보여주는 것도 태국 전통 무용을 적당히 베낀 형편 없는 것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서있는 경찰이나 군인들도 눈에 생기가 없기는 매일반인데, 이들 대부분이 사면 받은 크메르 루주 게릴라들이라고 하더군요. 멍하니 서 있는게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조잡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무기를 반납해서 보상 받고 행복하게 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얼마나 교육 시스템이 붕괴되었던지 성인 문맹률이 너무 높아 그런 그림으로 선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교사와 지식인들은 크메르 루주의 1차 숙청 대상이었다죠. 정작 크메르 루주의 지도부에는 좋은 가문 출신에 국비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수십 년 간 내전 동안 뿌려진 무기가 너무 많고 심어진 지뢰가 너무 많아, 제가 갔을 때도 국제 민간 기구가 지뢰 해체와 무기 회수 운동을 한창 벌이고 있었습니다. 지뢰 제거 운동을 하는 캄보디아 민간인 자원 봉사자가 운영하는 지뢰 박물관에 갔다가 소액이지만 기부금을 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사람도 어려서 크메르 루주에 징집된 소년병 출신이었습니다.
거기다 훈센 일가의 독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죠.
이번 납치 사태는 단순히 캄보디아인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중국계 대형 범죄 조직의 주도 + 한국인 브로커들 및 한국인 범죄 조직 + 캄보디아인 하급 폭력 조직의 콜라보인 거죠. 부패한 현지 공권력이 뒷배를 봐주고요.
희망이 없는 사회는 범죄를 조장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혐오의 조직화도 희망의 부재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고 봅니다. 전세계 극우의 확산도 그렇고요
캄보디아도 사회적 희망을 키우지 못하면 언제든지 이런 범죄들이 퍼질 겁니다. 혐오와 극우 세력의 창궐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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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igwrigglewriggle
25.10.15 · 125.♡.75.215
범죄도시 4탄인가 소재로 나올 정도면 몇년전부터 심각성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는 태국 파타야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동남아로 IT나 또는 간단한 업무로 고소득을 올린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죠. 동남아에서 낙후된 캄보디아라면 이건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인겁니다. 희망이 없으니 혹해서 간다?? NO~ 이제는 알면서 가는겁니다. -
LLV426
→ Bigwrigglewriggle 작성자
25.10.15 · 39.♡.223.199
희망이 없으니 혹해서 간다는 말은 제 글 어디에도 없는데, 이렇게 읽는 분이 있다는 건 제가 글을 잘못 썼나 봅니다. -
BBigwrigglewriggle
→ LV426
25.10.15 · 125.♡.75.215
아이고 죄송합니다. 자꾸만 사람들이 캄보디아 가는 사람들을 순화하는 느낌이라서요.
캄보디아가 낙후된 국가라 그런 건 어쩔 수 없겠죠. 우리나라도 80년대 인신매매가 있었던 나라였어요. 게다가 사회적 희망으로 그런 범죄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개인적 관점으로는 발전을 하면서 범죄의 유형이 달라질 뿐이죠.
IT 코딩 납치 초기가 태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만 봐도 캄보디아가 낙후된 환경과 희망이 없어서 이런 범죄가 행행하는 것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
LLV426
→ Bigwrigglewriggle 작성자
25.10.15 · 39.♡.223.199
80년대 인신매매는 우리나라도 심각했습니다.
캄보디아 80년대는 베트남군 및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반 크메르 루주 세력과, 미국 유럽 태국 등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 루주가 한참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는 건 알지만, 인신매매매가 성행했는지 말았는지는 모르겠네요. -
아아드리아
25.10.15 · 223.♡.174.24
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
캄보디아 범죄는 희망 없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괴물인 걸까요.
간격이 커보이지만 어찌보면 우리 사회와 종이 한장 차이일듯해요. -
소소심이
25.10.15 · 121.♡.4.124
제가 한 20년 전에 방콕에서 육로로 씨엠립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자 친구의 지인 둘과 함께 앙코르와트 보고 방콕으로 돌아오는데 우기라 길이 끊어져서 차가 멈췄는데... 와... 어디에서 갑자기 오토바이를 탄 무리들이 와서 국경까지 태워다 줄테니 돈을 내라고 마구....
제가 다시 씨엠립으로 돌아가고 비행기를 놓치면 놓쳤지 오토바이 타고 국경으로 못 간다고 버티다가 당시 지나가던 한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국경까지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 여친의 지인들은 간도 크게 그 남자들의 오토바이 뒷자리로 앉고 뛰어가서 오토바이 막고...
오토바이 타고온 무리들 눈빛이 너무 이상해서 께림칙하더군요. 실제로는 별일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캄보디아 뉴스를 보니... 옛생각이 나네요.
방콕에서 씨엠립 들어갈 때 택시가 중간에 고장나 밤이 오는 들판에서 본 캄보디아의 마을과 논의 풍경은 지금까지도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디서 저 아가씨들을 재우나 하면서도 그 풍경이 너무 압도적이라 걱정이 들지 않았어요.
배낭하나 매고 어깨에는 온갖 세상의 고민을 얹고 눈은 답을 찾아나서는 방랑자를 흉내내며 히말라야와 동남아의 싸구려 숙소를 찾아다니던 그 시절이 제 삶의 화양연화였더군요.
쓰다보니 갑자기 감상으로.... -
LLV426
→ 소심이 작성자
25.10.15 · 39.♡.223.199
어쩌면 저하고 여행 시기가 비슷했을 수도 있겠네요. -
중중경삼림
25.10.15 · 115.♡.0.103
저는 2006년 1월에 태국 국경 넘어 캄보디아로 갔었어요
제가 가본 동남아들은 그래도 에너지가 있고 발전하겠네 생각이 들었었는데 캄보디아는 그런 느낌이 안 들더라구요
오죽했으면 제가 여행 다녀오고 난 다음에 ‘캄보디아는 조상이 만들어 준걸로만 먹고 살려고 한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깐요.. -
LLV426
→ 중경삼림 작성자
25.10.15 · 39.♡.223.199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는데 동의합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고, 동남아에서도 잘 사는 편이었다는데 말이죠. -
봇봇대스
25.10.15 · 121.♡.90.120
댓글들을 보니 그 시기에 여행갔던 분들이 많군요. 저도 2005년에 육로로 방콕-아란야뿌라텟-뽀이펫-씨엠립 경로로 다녀왔습니다. 기억에 참 많이 남았던 여행인데 그 때도 한인사회 내에서 조폭들한테 식당주인 한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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