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추억
설중매

Lv.1 설중매 (211.♡.2.238)

2025년 10월 25일 AM 02:20 · 수정됨(11. 11. 00:14)

조회 1,446 공감 0

제가 먹고 대학생 시절, 지방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께서 "지역에서 산머루를 재배하여 머루즙과 와인을 생산해 판매하려는 구상을 가진 민원인이 계시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셔서 동생과 함께 일본의 야마부도(산포도, 한국 산머루와 유사) 재배법에 관한 책을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연수생으로 초청받아 공부한 경험이 있는 동생이 초안을 번역하면 제가 타이핑과 문맥에 맞게 정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일본 문고본 크기로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을 방학 동안 동생과 틈틈이 완성했죠.


원래는 시의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동료가 담당하시던 민원이었는데, 그 동료분이 아버지께서 일본어를 조금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퇴직 후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셔서 능통하시고 시간도 많으시지만, 당시에는 초급을 막 벗어나 중급으로 가는 단계였고, 업무도 바빠 두꺼운 책을 직접 번역할 시간이 없으셨죠. 그래서 결국 먹고 대학생들이 그 일을 대신 맡게 된 겁니다.


금전적인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와 동생은 야마부도가 뭔지도 몰랐지만, 지역 주민 한 분이 산머루 농원을 열고 상품화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계셨기에 무료로 돕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산머루와 일본 야마부도는 모두 포도의 야생 품종으로, 산머루 재배와 가공에 참고하고자 번역을 부탁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에 관련 책이 없어서 일본 현지에서 야마부도를 재배하는 분이 추천해주신 책을 번역한 일이었죠. 선의와 도전 정신으로 열심히 번역한 후, 생각날때 마다 두고 보기 좋게 학교 앞 제본소에서 책으로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뒤로 개강 후 학교 생활에 바빠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으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열어보니 감사 편지와 함께 직접 재배하신 산머루주가 들어 있더군요. 그날 저녁 어머니께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주셨는데, 카레와 와인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카레를 만들면 와인을 곁들여 즐기곤 합니다. 얼마 전 우연히 들었는데, 지금은 그분의 아드님이 농원을 이어받아 대표로 일하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요즘 판사란 작자들이 룸살롱에서 '애기들이 따라 주는 수백만 원짜리 술'을 접대받았다는 뉴스를 보며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학생 시절 선의에 대한 감사로 받은 산머루 와인 선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죠. 어제 새벽에는 판사 놈들이 내란수괴에 부역한 일당들의 구속영장을 무더기로 기각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하루 종일 열이 받습니다. 정의를 지켜야 할 자들이 오히려 제도를 왜곡하며 앞장서는 상황에 분노를 느낍니다.


예전에 읽었던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의 눈에 패배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사람들의 눈에 분노가 서린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의 포도가 하나 가득 가지가 휘게 무르익어 간다."

(In the eyes of the people there is the failure; and in the eyes of the hungry there is a growing wrath. In the souls of the people the grapes of wrath are filling and growing heavy, growing heavy for the vintage.)


요즘 조희대와 판사놈들의 행태를 보면

법을 악용하는 법비(法匪)와 법미꾸라지 같은 법추(法鰍)에 분노한 포도알들이

다시 연대하며 들끓는 계절이 곧 올 것 같습니다.



댓글 (8)

  • 은비령

    은비령 Lv.1

    25.10.25 · 175.♡.75.77

    가족분들 모두 대단하시네요.
    저런 작업을 무료로 해주시다니요. 능력도 출중하지만 마음 씀씀이도 빛이 납니다.

    스타인백의 분노의 포도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제목이네요. 예전에 명작 소설로 가끔 거론되던건데 이젠 시간의 무게 덕에 잊혀져 가는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 설중매

    설중매 Lv.1 → 은비령 작성자

    25.10.25 · 220.♡.235.240

    돈많고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의 책이라고 비난받았죠. 역설적이게도 대공황기여서 책보다 빵한개가 소중하던 시절이었지만 사람들이 대체 어떤 책인가 궁금해해서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구요.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25.10.25 · 223.♡.48.95

    새벽에 고양이들 싸움에 깨서 읽고, 더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읽으니 더 좋은 글이네요. (으르신이 다시 보이는 글이라고 하면 넘 버릇 없을까요. ㅋㅋ)
    오늘 오후에 영화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건 미뤄두고 엄마 몰래 집회에 갈 수 있으면 가야겠어요.
  • 설중매

    설중매 Lv.1 → 아기고양이 작성자

    25.10.25 · 223.♡.81.103

    오늘은 아버지 생신이라 아침 일찍부터 본가에 가는 길입니다 ㅎ 아침 기온이 쌀쌀하던데 따뜻하게 차려입고 다녀오세요. 고맙습니다.
  • 에스까르고

    에스까르고 Lv.1

    25.10.25 · 183.♡.123.226

    1998년 대학 1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가 법대 4학년 선배였습니다.
    아주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룸메이트로서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잘 모르고 모났을 제게 그리 싫은 소리 하지 않았죠.
    아무래도 그는 제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법조인인지라 가끔 생각합니다. (지금 큰 도시 부장판사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좋다고 한들, 그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셈법이란 게 있구나 싶죠.
    예를 들어 고시에 떨어지면 "징역 1년에 1천만원 벌금" 뭐 이런 식입니다.
    (98년 당시 물가로 1년에 1천만원으로 버틸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숙사와 학교식당/고시 식당 등에서 지내는 최소 비용이었겠죠)
    또 하나, 그때 말로 "합격하면 무제한 카드 받고 뚜쟁이들 들러붙을 텐데, 나는 그게 싫으니 합격 전에 인연을 만들어야겠다" 는 것도 제게는 충격이었어요.
    본인이 싫다고는 하지만, 일단 현실적으로 계산하고 '당연시'하는 것들이 있다는 얘기니까요.

    99년, 그가 합격했다며 연락해 와 저녁을 사준 게 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때도 보수적인 정치발언- 김대중도 정치보복할 줄 몰랐다-을 하던 평범한 부산의 보수적 정치색채를 보이던 그는,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저와는 매우 다른 인식을 갖고 있겠지요.
  • 설중매

    설중매 Lv.1 → 에스까르고 작성자

    25.10.25 · 222.♡.244.77

    검찰에서 일하는 제 친구들만 봐도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지 알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예전부터 저랬습니다. 조희대만 끌어 내리면 사법부의 태도가 변할 거라고 보는 나이브한 생각은 버려야죠.
    이번일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거고 사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패하고 방만하게 운영되어 온 곳이 사법부입니다.
  • 매일두유

    매일두유 Lv.1 → 설중매

    25.11.11 · 59.♡.17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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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두유

    매일두유 Lv.1

    25.11.11 · 59.♡.17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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