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데셀리암 (14.♡.75.210)
2025년 11월 8일 AM 10:31 · 수정됨(13:40)
다모앙에도 많이 계신 다른 대부분의 4050 분들처럼,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 가난했다는 기억이 나네요.
지방 어딘가의 미군 부대 옆 기지촌 산동네, 시멘트 블럭으로 쌓아올린 후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집들, 골목 안의 여러 가구가 공용으로 쓰던 푸세식 화장실, 밤마다 옆집들에서 들려오던 악다구니쓰며 싸워대던 소리..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어린 시절의 추억입니다.
산 아래 평지의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죠..)에 다녔는데,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오다 보니 나름 괜찮은 집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빠 대학 나왔어'라는 얘기를 들으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애인가 싶었죠.
폭삭 속았수다의 애순이가 생각 납니다만, 그때도 반장 같은 자리는 '좀 사는' 친구들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어린이 날에는 학급 임원들의 부모님들이 선물을 돌리곤 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선물 중 하나가 '칸나 둘리 공책'이었습니다. 당시 주로 쓰던 공책은 갱지로 만들어서 책받침을 대지 않으면 글씨를 제대로 쓰기 힘들었는데, 이 고급 공책의 새하얀 속지에 글 쓰는 게 너무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표지에 그려져 있던 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였습니다. 오페라가 뭔지도 모르고 시드니가 어느 나라인지도 몰랐지만 어린 시절 '선진국은 이렇게 근사하구나 우리나라와는 정말 다른 대단한 나라구나'라는 느낌을 구체화시킨 오브제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제가 거기 가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못 했었네요.
성인이 된 후 출장 때문에 더 멀리 있는 나라도 여럿 다녔습니다만, 결국 가족 여행으로 찾아간 오페라 하우스에서 제 속의 무언가 또 하나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살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란 감회가 복받쳐 몸이 떨렸습니다. 동시에 함께 간 제 아이들이 너무 부럽더군요.
좋은 시절에 좋은 나라에서 여유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런 걸 당연한 듯이 누리는구나 참 부럽고 다행이고 너희들에게 이런 걸 해줄 수 있어 아빠는 너무 행복하구나
작년 12월 여행의 기억입니다. 멧퇘지 새끼가 기어코 미친 짓을 하던 딱 그때네요. 한국 상황이 많이 걱정되었지만 그럼에도 시드니는 너무나도 멋진 여행지였고 행복한 기억을 많이 남겨주었습니다.

구글링을 하니 그 공책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구글 대단해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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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sRacco
25.11.08 · 118.♡.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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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란데셀리암
→ 0sRacco 작성자
25.11.08 · 211.♡.226.30
동년배시군요^^
당시 똥지 공책들이 빠르게 백상지?로 교체되었는데 처음 그 공책을 받아들었을 때는 정말 감동스러웠습니다. -
00sRacco
→ 란데셀리암
25.11.08 · 118.♡.14.50
똥지에 글씨 쓰고 지울.때는 지우개보다는 손가락에 침 묻혀서 문대는 게 더 효과적이었어요 ㅋㅋ 그런데 백상지는 그렇게 하면 지워지지가 않아서 좀 당황스러웠어요 ㅋㅋㅋ -
BBeyond
25.11.08 · 104.♡.68.24
옛 생각이 많이 나게 하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란란데셀리암
→ Beyond 작성자
25.11.08 · 211.♡.226.30
4050 회원 분들 모으는 게시물 같군요^^
글 쓰면서도 우리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 그간 힘써주신 분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소소심이
25.11.08 · 121.♡.4.124
지난 8월에 처음 호주에 가서 오페라하우스 보고 제가 느낀 감정과 비슷하시네요. ㅋ 제 딸래미도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더라구요. -
란란데셀리암
→ 소심이 작성자
25.11.08 · 211.♡.226.30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된 나라에서 살게된 세대와 태어날 때부터 괜찮은 선진국에서 살아오고 있는 세대 간의 감흥이 아무래도 다른 모양입니다^^ -
PPWL⠀
25.11.08 · 175.♡.119.153
정말 정말 정말 돈 많으면 시드니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해변이 대도시 한복판까지 있는 곳은 드물잖아요.
저는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를 봤는데 모짜르트의 마술피리였습니다. 밤의 여왕을 한국인이 해서 또 신기했어요. -
란란데셀리암
→ PWL⠀ 작성자
25.11.08 · 211.♡.226.30
말씀처럼 페리를 시내버스처럼 타고 다니는 감각이 다른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이었습니다.
저희 애들도 이제 좀 크니 여행을 가면 해당 지역의 문화 컨텐츠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오페라 직관도 무척 기억에 남을 경험일 것 같습니다. -
삼삼불거사
25.11.08 · 175.♡.137.50
저랑 같은 추억을 가진분이 있다니... 저도 저 노트를 통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알았고, 작년 8월에 처음 갔다왔습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저도 어린시절과 저 노트를 떠올렸어요. 같은 세대의 기억과 공감이라는 건 참 감동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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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좋은 경험 시켜주실 만큼 되셨으니 대단하십니다 {emo:damoang-emo-003.gif: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