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써둔 기독교 관련 뻘글 #2
M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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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6일 PM 04:49 · 수정됨(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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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해 예전에 써놓은 끄적임 #2.

평신도들 읽으시라고...

[성서를 저항문학으로 보기]


[한국 기독교는 왜 개독교인가? 성서를 대체 어떻게 보길래?]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봅시다.


유럽의 좀 건전하고 상식적이라는 기독교들과 미국의 보수적이고 이상한(한국에 영향을 많이 준...) 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개독교까지... 신기한 점은 모두 똑같이 성서라는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텍스트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양상이나 하는 말, 행동 등이 현저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의도는 개독교를 변호하려거나 혹은 반대로 원색적으로 비난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그냥 저는 드라이하게 성서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성서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은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제가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가끔 던지는 화두인데요, 성서가 일종의 [저항문학]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성서를 보고 해석함에 있어서 [신화]적, 그리고 [저항문학]적의 대척되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성질이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에게 익숙한 단군 신화를 보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기원을 하나로 묶고 단일 공동체로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 등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정체성을 규정하며 결국 삶에 있어서 하나의 통일된 관점을 유지하려고 하는 기능성을 갖죠.


그렇다면 성서는 무엇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성서의 가장 첫 장이 세상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을 이야기하고, 중간중간 가나안 땅에서의 투쟁과 정복이 그려지며 그 곳의 토착민들을 마치 '괴물' 혹은 '절대악'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신화인 것 같습니다. 신약 성서에서의 [복음서] 역시 신적인 예수의 탄생과 시련, 성장, 결국 신으로서의 완성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역시 하나의 신화로 봐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흔히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겁니다.


'성서는 주변에 있던 바벨론 설화나 그레코로만 신화를 차용해서 만든 날조된 문서'라는 관점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나 노아와 홍수 이야기는 바벨론 신화와 굉장히 흡사하며, 예수 이야기는 그레코로만 신화의 주요한 주제였던 '반인반신'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양있는 우리는 이 정도 사실을 접하고 '역시 맞다. 이거 다 날조다!'라고 결론내고 끝내면 안되겠죠.

고대문서는 늘 '왜 그랬는지'를 탐구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성서도 마찬가지죠.


먼저 성서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아주 간단하게 짚어봅시다.

이것은 책 몇 권으로도 설명이 부족할만큼 엄청난 연구 실적들이 이미 존재하지만, 아주 거칠고 대충 설명해보려 합니다.


구약성서의 경우, 좀 상상력을 동원해보죠.


아마 성서에서는 가나안 땅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흩어져 살고있던 부족체들이 상당히 많았을겁니다. 이들은 서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또 지중해 바다를 통해 다른 이민족들도 침투해오고 갈등과 집합, 서로에 대한 정복을 반복하며 하나의 큰 정치 체제로 합쳐지는 과정을 겪었을 겁니다.


처음엔 각 부족 혹은 지역의 종교지도자들이 정치적 권한을 쥐었을 것이며(사사라고 불리죠), 이 집단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합쳐지면서 종교 제의가 한층 복잡해지고 교리가 정교화되었을 겁니다.


실제로 성서를 보면 이런 흔적들이 다소 보입니다.


가장 먼저 창세기를 보면 가인과 아벨의 반목이 눈에 띄죠. 이는 농경 집단과 유목 집단의 갈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어떤 통일된 정치 공동체가 마치 순식간에 가나안 땅을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하듯 묘사되지만 중간중간 원주민들과 타협하고 같이 잘 사는 모습이 엿보이며, 사사기를 보면 블레셋이 가장 큰 악의 축으로 묘사되는데, 이 블레셋은 왕정 시대에는 전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대량 학살을 한 것도 아닐테고요. 블레셋이 지금 그 땅을 지칭하는 '팔레스타인'의 어원입니다. 그냥 한 민족이 되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겠죠.


사무엘상 후반부를 보면 최초로 왕정국가의 기반을 다졌다고 여겨지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협력하는 장면도 묘사됩니다.


사무엘하 초반부에서 다윗이 처음 왕으로 옹립된 장소가 헤브론입니다. 이후 바로 예루살렘이 언급되는데요, 이 곳은 '여부스 땅'이라고도 표현됩니다. 그리고 여부스 사람은 적으로 묘사되죠. 

다윗의 헤브론에서 여부스, 즉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는 일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상합니다. 오랜 수도 역할을 했던 헤브론을 버리고 굳이 왜 예루살렘으로 거처를 옮겼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거처를 옮긴 직후 [사독]이라는 제사장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레위 자손, 혹은 [아론의 아들들]만 제사장이 된다고 묘사되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후 이들은 엄청난 영향력을 갑자기 행사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두고 아마도 다윗이 여부스와 전쟁을 해서 함락했다기보다는 고위층과 권력을 나눠갖고 회유를 해서 큰 정치 공동체를 만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렇게 추측할만도 한게, 이후 [사독] 계열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종교 권력을 그야말로 '휘어'잡거든요. 이 권력이 어디까지 이어지냐하면 신약 성서에서 등장하는 [사두개인]의 어원이 바로 이 사독계열 제사장들 그룹입니다.


다시 거슬러올라가면 이름에 똑같은 어미를 가진 왕이 그 전에 있습니다. [아도니세덱]이라는 왕이 그것인데요, 이는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 인물은 여호수아서에 매우 잠깐 언급되는데요, 성서에는 예루살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가나안 땅 안에서 [사독], 혹은 [세덱]은 예루살렘 지역의 정치공동체를 다스리는 고위층, 종교지도자를 의미하는 단어 혹은 성일 수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이 흔적은 그런데 성서의 극 초반부에도 나옵니다. 평신도들에게는 다소 신비하게 여겨질 구절이 창세기에 있는데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입니다. 정말 뜬금없이 갑툭튀하는 인물인데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자 어버이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절하고 영접했다고 묘사되죠. 예루살렘을 연상케 하는 '살렘 왕'이라는 표현에, 묘사도 아주 장중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창세기의 최종 형성이 이스라엘의 왕정이 끝난 후 포로기 혹은 그 이후 완성되었다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이후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 그룹이었던 [사독]계열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정체성 강화를 위해 이 구절을 끼워넣었다고 한다면 설명이 명쾌하게 됩니다.


뭐 구질구질하게 설명이 장황하고 길어졌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구약성서는 이처럼 구전되어 내려온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특별한 목적에 의해서 하나의 책으로 엮여진 것'이라는 겁니다.


다양한 문서층들이 존재하고, 저자도 다양하고 최종 편집도 특정한 의도를 갖고 이뤄졌으며, 중간중간 첨삭도 많이 가해졌다는 겁니다.


여담이지만, 오경을 모세가 썼다고 가르치는 일부 한국 신학교들은 대체...


그래서 구약성서를 볼 때 중요한 질문은 [누구보고 읽으라고 썼는가?], 즉, 독자층에 관한 질문이 있어야 하며,

그 다음은 [무슨 의도로 썼는가?]입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거라 많은 예를 들 수는 없는데요,


먼저 창세기를 예로 들어본다면, '바벨론 신화와 닮아있다'는 점은 바벨론에 대한 안티테제 및 패러디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창조 설화는 [당시 세계를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바벨론의 신화의 주인인 마르둑 신은 인간을 싫어하고 하찮게 여기는데 비해 하나님(야훼)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하시며 어쩌고 저쩌고....]의 의미를 담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려면 그냥 독창적인 신화를 창조하는 것 보다는 바벨론의 신화를 역이용해 안티테제적인 메시지를 담는게 효과적이었다는 것이죠.


창세기를 이렇게 보는 순간 [신화]가 아닌 [저항문학]이 됩니다. 다윗 왕정 이스라엘 및 유다를 멸망시켰던 신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근동지역의 패자로 군림했거든요. 그러니까 70년간 포로 생활을 한 이스라엘 고위층들은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되어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야 했으며, 이를 [바벨론 신화]를 뒤틀고 패러디함으로써 큰 효과를 거두려 했다는 것이죠.


[안식일]에 대한 것도 자세히 보면 재미있습니다. 한 주를 7일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명백히 바벨론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중에서 '하루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당시 포로들의 고단한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주에 한 번 쉬는 것은 신의 명령이다]라는 메시지를 여기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쭉쭉 건너 뛰어서 


복음서로 넘어가보죠.


명백히 예수 이야기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신의 아들, 그리고 반인반신이라는 정체성, 출생 직후의 생명의 위협, 한 편으로는 평범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범상치 않은 성장 과정, 각성 직후 신의 아들로서 능력 발휘, 그리고 영웅적인 삶과 죽음(혹은 그에 준하는 위협), 그리고 부활(혹은 죽음과도 같은 위협의 극복)... 그렇게 반인반신은 결국 신 혹은 신에 준하는 인물이 되어 별이 된다.


또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봅시다.


예수라는 존경스러운 삶을 살다가 간 한 인물을 삶의 목표로 두고 구도하는 수행자 집단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마 예수의 제자들쯤 되겠죠.


그런데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려서 죽고, 이제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가르친 것은 그저 산 속에서, 혹은 들판으로 가서 숨어서 수행하라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생활 속에서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약자들을 돌보고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의 어록을 보면 개인윤리에는 별 관심이 없고(창녀나 가난한 자, 미친 사람, 거지 등에 대한 관심들), 반대로 권력을 갖고 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사회의 구조악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유대교를 지배하던 '율법'에 대한 파격적이고 새로운 해석과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보면 확실하죠. 다만 가방끈이 짧았던 예수는 이를 구체화, 교리화 시키진 못했지만요.


그런데 기막힌 타이밍에 바울이라는 엘리트가 등장합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바울은 자신이 연구하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답이 예수의 삶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진짜로 눈이 멀 정도의 충격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개인의 구도나 개인의 윤리적 삶이 더 나은 세상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좌절한 바울이 [사회윤리를 공동체적으로 실천]하겠다는 예수의 대담한 주장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바울은 이에 아예 [사회윤리를 신격화]시켜버립니다. [예수를 신격화]시킴으로써요. 정확히는 예수라는 인물 자체를 신격화했다기 보다는 [예수적 삶]을 신격화한 것이죠.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라는 신은 참 이상합니다. 헤라클레스처럼 신의 아들인데도 시골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주목할 점이라면 별로 배우지 못했음에도 대단히 현명했다는 점. 신적인 힘이 있었음에도 전혀 신적인 힘을 자신을 위해 발휘하지 않되, 가난한 자, 병든 자, (당시 엄청난 차별을 받았던)여인들, 사회의 구조적 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위해서만 살며, 반대로 권력자나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가차없는 태도를 취했죠.


그리고 로마라는 절대 권력과 부패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합세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할 때, 어이없게도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마치 어린 양처럼 너무나 무력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3일만에 '신적 능력'으로 부활하고 예수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교회 공동체에게 모든 능력과 권력을 위임하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전반적으로 헤라클레스를 닮은 이야기지만 예수는 강력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력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무력함이 강력한 로마의 압제를 이기는 힘이 됩니다. 민중들을 뭉치게 해주거든요.


이렇게 복음서를 하나의 [저항문학]으로 본다면, '단순히 예수를 신격화 시키기 위해 당시 유행했고 널리 퍼져있던 신화를 차용'한 날조된 문서가 아닌, [지금 부패한 이 세태에 저항하는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사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예를 거칠게 들어서 설명했지만 성서 전반을 보면 이런 [저항문학]적인 요소가 정말 가득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서가 대표적이죠.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굉장히 다른 책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서]라고 묶인 하나의 책으로 다룹니다. 왜냐하면 [저항의 정신]이 구약과 신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된 교회라면 성서를 [신화]가 아닌, [저항문학]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로는, 많은 목사님들이 제대로 성서를 모릅니다. 그나마 각 구절을 파편화시켜서 달달 외우긴 하는데, 그야말로 입맛에 맞는 구절을 따서 끼워맞추는 형국이라 신천지의 성격 해석과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특히, 소위 엘리트 목사라는 사람들은 성서를 [신화]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천재적이기까지 합니다. 성서의 내러티브를 파편화시킨 후 기존의 교회 조직을 강화시키는데 이 내러티브들을 이용하거든요.


또 성서처럼 방대한 고대문서의 특징이라면, 입맛대로 잘라서 마음대로 이용하기에 딱 적당하고 좋다는 겁니다. 요셉 설화를 그저 기독교인의 하나의 성공담, 성공사례의 예로 사용한다든가, 뭐 다윗이나 다니엘 등의 인물도 마찬가지죠.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는 꽤 익숙한 장면일겁니다. 허구헌 날 이런 성공담 이야기만 하거든요.


그래서 순서도 뒤바뀌어 있죠. 이미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고 전제를 깔아놓으니 그저 신이 유희 좀 하다가 하늘로 승천한 모양새로 복음서를 그려놓습니다.


그런데 기원 후 60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예수가 죽은지 불과 몇 십년이고, 예수를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의 태반이 살아있을 때요.

그 사람들이 복음서를 처음 접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예수가 사람인 것을 알고 죽었다는 것도 잘 알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시작부터가 [예수는 원래 신이었는데 잠깐 사람의 삶을 산거다]가 아닌, [예수는 사람이었는데 충분히 신이라고 불릴 자격을 갖춘 삶을 살았다. 그래서 신이다]는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그레코로만의 신화의 상투적인 표현과 묘사들, 그리고 심지어 로마 황제에게만 바쳐졌던 칭호가 용어들이 예수에게 거침없이 투영되는 이야기를 보며 얼마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또 자신의 공동체에 자부심을 가졌을까요?


아직도 잘 안와닿는 분들에게는


자신이 천민 혹은 평민, 잘 해봐야 서자의 신분으로 조선 말로 가 있다고 상상한 후 [홍길동전]을 접했다고 생각해보시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허구이며 율도국도 실제로는 없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홍길동전]이 현대에까지도 생명력을 갖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내용이 허구일지언정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만약 조폭들이 조직 하나 만들어 놓고 '율도국'이라 칭하며 [홍길동전]을 자신들의 신화로 사용한다면 굉장히 오염된, 잘못된 오용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홍길동전]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저항문학]이기 때문인 것이죠.

댓글 (4)

  • 대끼리

    대끼리 Lv.1

    24.05.06 · 211.♡.105.2

    제도 개신교도 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신교가 뭔뜻인줄아냐?
    새로 고쳤다는거다.
    뭘 새로 고쳤는지는 아냐?
    가톨릭이 부패한 것, 옳지 못한 것을 고친거다.
    그걸, 영어에서는 protestant 라고 한다.
    그 단어는 protest 저항하다에서 나왔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자는 개신교도가 아니다,

    물론, 예루살램의 몽키스패너 이야기도 가끔해줍니다.
    해방신학이 뭐라고 생각하니? .... 쿠럭...
  • 유비현덕

    유비현덕 Lv.1

    24.05.06 · 116.♡.103.4

    흥미롭네요ㅎ 맞죠 굳이 따지자면 당시에는 좌파적 성격이강했는데 왜...
  • Dymaxion

    Dymaxion Lv.1

    24.05.06 · 211.♡.249.184

    불교의 경우를 참고로 보면...
    불교 경전의 연원을 학술적으로 따지거나 위경 여부를 판별하는 등은 학술적으로 잘 연구되어 왔다고 보입니다.

    개신교와의 차이점은, 불교에서는 이단 개념 자체가 사실상 없는 것 같고요. (물론 의견 차이는 있지만)
    각 종파에서 종지로 삼는 경전이 있다고 해도, 그 경전에만 목메다는게 아니고 다른 경전들이나 생각들에 대해서 별다른 규제를 하는 종파가 없는 것이라는 점 같습니다.

    그리고 학술적으로 연구된 경전에 관한 컨텍스트나 정보들에 대해서도 부정하는 집단은 없고요.

    이렇게 된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제 생각에는 불교 경전이 사이비 이론을 만들기에는 너무 난해해서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더군요. 사이비 이론이라는게 잘 공부하지 못한 몽매한 자들을 현혹하기 위해 만드는 건데, 너무 난해하다 보니 애초에 상품성(?) 자체가 안 생기는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실제로 인도 본토에서 불교가 폭망한 이유중 하나로 난해함을 꼽더군요. 너무 학구적으로 변해서 민중들과 괴리되어 버리니깐요.)

    반면에 기독교 경전의 경우에는, 고대 원시 종교에서 계속 이어져 온 거다 보니깐, 매우 1차원적이고 고대 중동에서의 생활에 밀착(?)한 낮은 레벨의 논리가 많이 차지합니다. 물론 나중에 신학이 발달하면서 나름대로 이론적인 층위가 많이 쌓이기는 하지만, 경전 자체가 딱 고정되어서 그대로 전승되다 보니, 로마시대 이후 변화는 사실상 없쟎아요.

    어느게 낫다 나쁘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냥 역사적인 맥락이 많이 다르다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다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당장 개신교 주류의 기복신앙적 성격이 너무 강해졌고, 여기서 파생된 사이비 종파들도 난립을 하는데다가 정치에도 영향을 주려고 하면서 해악을 끼치는 단계까지 진화해서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 바세린

    바세린 Lv.1

    24.05.06 · 223.♡.46.67

    비신자들이 성경을 문학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건 자연스럽죠. 어떤 문학작품이든 거기엔 배울 꺼리가 있고 취할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경전인지라 문학작품취급 받는 걸 못견뎌하는 교인들이 있습죠. 코란을 훼손해서 살인까지 저지르는 게 종교인들이 불경죄를 취급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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