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돼지 (125.♡.175.132)
2025년 12월 5일 PM 10:04 · 수정됨(12. 06. 00:05)
한국 근대사, 특히 군사정권 시절 법관(판사)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학생이나 시민, 노동자처럼 물리적인 '피(사망이나 신체적 고문)'를 흘린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대다수의 법관들은 체제 순응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지만, 사법부 내부에서도 권력에 저항하며 '직(職, 판사직)'을 걸고 싸운 역사는 존재합니다. 이를 '피' 대신 '법복(법관의 지위)'을 벗어 던진 저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1. 피 대신 '법복'을 벗다: 사법파동 (Judicial Crisis)
법관들이 흘린 것은 물리적인 피가 아니라, 그들의 생계와 명예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저항은 1971년 제1차 사법파동입니다.
배경: 1971년,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이 시위 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국가배상법에 위헌 제청을 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범렬 부장판사 등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사법부를 탄압했습니다.
저항: 이에 반발하여 전국 판사의 약 3분의 1인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이는 한국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자 가장 강력한 집단 저항이었습니다.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수습에 나서며 사태는 봉합되었으나, 이후 유신 헌법이 선포되면서 사법부는 암흑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2. '소신 판결'과 인적 청산 (불이익)
직접적인 폭력보다는 인사 불이익과 재임용 탈락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적 매장'을 당했습니다.
재임용 탈락: 유신 정권은 1973년 법관 재임용 제도를 악용하여,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소신 있는 판사들을 대거 탈락시켜 법복을 벗겼습니다.
대표적 사례:
이영구 판사: 1976년, 수업 중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뒤,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법복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시국 사건에서 피고인의 편을 들어주거나 영장을 기각한 판사들은 정보기관의 사찰 대상이 되거나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3. 법관들이 흘리게 한 피: 사법 살인 (Judicial Murder)
법관들이 '피를 흘렸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 오히려 법관들이 **'죄 없는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뼈아픈 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혁당 사건 (1975): 대법원은 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을 확정 판결했고,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은 국제 법학자 협회로부터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가 되어 무고한 시민을 죽인 **'사법 살인'**의 대표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요약 및 결론
"법관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나, 펜 끝으로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한 적은 많았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법관 집단은 투쟁의 선봉에서 피를 흘린 주체라기보다는, 1) 권력에 순응하여 독재를 정당화해주거나(다수), 2) 양심에 따라 판결하다가 조용히 법복을 벗겨진(소수) 존재들에 가깝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며 고문당하고 싸운 법조인들은 주로 법원 밖의 **'인권 변호사(조영래, 한승헌 등)'**들이었습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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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커먼사각
25.12.05 · 49.♡.218.16
하다못해 학생시절에도 그 알량한 공부한답시고 학우들이 피흘리며 끌려가고 있을 때도 거들떠도 안보던 놈들입니다. -
농농약벌컥벌컥
→ 시커먼사각
25.12.06 · 172.♡.94.42
더해서 수업도 안빠졌을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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