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 (211.♡.64.83)
2025년 12월 16일 PM 12:10 · 수정됨(01. 01. 22:02)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자주 옵니다.
"문법 설명은 이해했고, 단어 뜻도 안다. 그런데 막상 말하려고 하면 어색하고, 읽으면 뜻은 알겠는데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연습 부족이나 재능 문제로 돌리지만, 실제로 더 큰 원인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외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규칙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세계의 기본값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모국어가 무엇을 전제로 작동하는지 의식하지 않습니다.
어릴때부터 몸에 익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이죠.
한국어는 대표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매우 많은 언어입니다.
“먹었어.”라는 문장 하나만 놓고 봐도 누가, 언제, 무엇을 먹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어 화자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죠.
말하지 않은 정보는 빠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공유되어 있다고 가정됩니다.
그래서 한국어에서는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무엇을 굳이 말하지 않았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그 생략의 감각이 곧 사회적 센스가 됩니다.
일본어도 생략이 많지만, 그 방향은 한국어와 미묘하게 다릅니다.
한국어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깐다면, 일본어는 “나는 단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기본값으로 삼습니다.
일본어에는 주어가 없을 뿐 아니라, 의도와 판단, 책임을 흐리게 만드는 표현이 매우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 게 아닐까요” 같은 말들은 단순한 공손함이 아니라, 관계의 마찰을 피하려는 언어적 장치입니다.
일본어 화자는 말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기보다는, 서로의 기분과 체면을 해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은 자주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질문을 했는데 명확한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본어의 기본값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가장 성실한 대응입니다.
영어는 이와 정반대에 있는 언어입니다.
영어에서는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어는 반드시 밝혀야 하고, 시제는 명확해야 하며, 생각인지 사실인지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I think”를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개인의 의견인지 객관적 사실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 됩니다.
영어의 기본값은 개인이 독립된 주체이며,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제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화자는 끊임없이 설명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어떤 근거인지, 자신의 입장인지 사실인지까지 모두 말로 일일히 드러냅니다.
한국어 화자가 영어를 사용하며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휘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평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되던 것들을 전부 언어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죠.
중국어는 또 다른 방향의 기본값을 가집니다.
중국어는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입니다.
문법젇으로 활용도 거의 없고, 조사도 없으며, 문장 구조도 비교적 직선적이죠.
하지만 중국어의 기본값은 형태가 아니라 어순과 맥락의 흐름에 있습니다.
중국어에서는 단어의 위치와 순서가 의미를 결정하고, 말의 흐름이 곧 논리가 됩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써도 어순이 바뀌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한 중국어는 관계와 체면을 중시하면서도, 일본어처럼 극단적으로 흐리지는 않죠.
즉 할 말은 하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려는 균형점에 서 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문법은 쉬운데, 말의 뉘앙스와 힘 조절이 어렵다고 느낍니다.
얼마나 직설적으로 말해도 되는지, 어느 선에서 부드럽게 돌려야 하는지가 규칙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 감으로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보면 외국어 학습이 어려운 이유는 분명해집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단어와 문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각 언어가 전제로 삼는 인간관계와 사고방식의 기본값을 다시 설정하고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죠.
한국어 화자는 “왜 이렇게 다 말해야 하지?”라고 느끼고, 영어 화자는 “왜 이렇게 안 말하지?”라고 느낍니다.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은 “왜 아무도 확답을 안 하지?”라고 혼란스러워하고,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왜 같은 말을 했는데 분위기가 달라지지?”라고 당황합니다.
외국어를 깊이 배운다는 것은 더 많은 단어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그 언어가 요구하는 기본값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이 정도는 말해야 하는 언어인지, 이 정도는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 언어인지, 단정해야 하는 언어인지, 여지를 남기는 것이 안전한 언어인지를 감각적으로 알게 되는 때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외국어를 번역해서 쓰지 않습니다.
그 언어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외국어 학습의 깊이는 결국 문장의 길이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외국어 공부가 어려운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요약 : 외국어 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단어나 문법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계의 기본값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댓글 (14)
- 탈
탈퇴한회원
25.12.16 · 58.♡.220.226
정성글이네요. 쓰신 말들 경험으로 공감하고, 어쩌면 반대의 얘기지만 한국에서 특히 영어는 영어국가 가서 섞여살 거 아니면 lingua franca 정도로만 목표하고 그 정도면 만족, 인정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면 좋겠어요. -
코코미
→ 탈퇴한회원 작성자
25.12.16 · 211.♡.64.83
사실 B2 수준으로만 구사할 수 있어도 그 언어 때문에 인생 발목 잡힐 일은 없고, C1은 그 나라 원어민 평균 수준의 실력, C2는 원어민 중에서도 상당히 언어능력이 좋은 수준이라고 하죠. -
니니케니케
25.12.16 · 222.♡.5.59
좋은 글입니다. 관련된 GPT의 해설글을 공유 합니다.
--------------이하 GPT의 설명-----------------------------------------------------------------
이 글의 관점은 흔히 떠올리는 문법 중심 언어이론보다는, 언어를 실제로 어떻게 쓰는가를 다루는 학계의 흐름과 더 가깝습니다.
먼저 촘스키의 생성문법은 언어를 타고난 인지 능력으로 보고 문법 구조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문장은 맞는데 말이 어색한 이유, 즉 맥락과 관계의 문제는 설명 대상에서 벗어납니다.
반대로 이 글과 가장 잘 맞는 것은 화용론(pragmatics)입니다. 화용론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 언어가 공유된 상황과 인간관계를 어떻게 전제로 하는지를 연구합니다. 한국어·일본어·영어의 차이를 ‘기본값’으로 설명한 부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한 약한 사피어–워프 가설처럼,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습관에는 영향을 준다는 관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글은 외국어가 어려운 이유를 문법이 아니라, 언어가 전제로 삼는 사고방식과 관계의 차이로 설명하는 화용론적 시각을 쉽게 풀어낸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코코미
→ 니케니케 작성자
25.12.16 · 211.♡.64.83
제가 의도한 내용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했군요. 결국 언어는 전제하는 사고방식과 관계 차이를 이해하냐 못하냐에 따라 수준이 갈리더군요. -
지지하철승객
25.12.16 · 211.♡.71.28
굉장히 재밌는 글이네요. 납득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언어별로 경계가 다른 말들이 많이 걸리적 거립니다.
별의별 곳에 다 사용하는 일본어 스미마셍이나
'찾았다'라는 말이 found, was looking 또는 找到, 在找 로 확실하게 나누어져있거나하는 것들요.
외국인들은 한국어로는 '알지 못한다'가 아니라 '모른다'라는 단어를 쓰는 걸 낯설게 느낄까 싶기도 합니다. -
코코미
→ 지하철승객 작성자
25.12.16 · 211.♡.64.83
전 문법적으로 일본의 경어와 사역, 수동, 사역수동 등에서 일본 특유의 수직적이고 영구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충돌을 피하려는 특유의 와(和) 사상이 느껴지더군요. -
치치미추리
25.12.16 · 106.♡.1.109
어제에 이어 또 한번 외국어 공부를 어떻게 더 해야하나 하고 고민하게 되는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
코코미
→ 치미추리 작성자
25.12.16 · 211.♡.64.83
가장 좋은 건 결국 그 나라 대중문화, 즉 책이나 영상매체 등을 곁들이는 게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 최선으로 이해가 되더군요.
속칭 10베라 해서 애니, JPOP, 게임 하던 오타쿠들이 일본어를 각잡고 배우면 훨씬 빠르게 일본어를 익힌다거나 미드나 팝송 할리우드 영화에 빠진 사람이 영어를 잘 공부하는 게 예가 될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나라의 문화, 관습, 정서 등을 배우고 난 후니 배우는 속도가 빨라지는 거죠. - 떡
떡갈나무
25.12.16 · 1.♡.2.244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코코미
→ 떡갈나무 작성자
25.12.16 · 211.♡.64.83
별 말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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