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스타 (211.♡.91.236)
2025년 12월 23일 PM 01:39 · 수정됨(16:46)
허지웅 작가님께서 올려주신 글은 잘 봤습니다. 역시 글쓰는 게 본업이신 게 느껴지는, 울림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여기에 반박하는 이 글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작가님께서 영화 <유전> 개봉 당시 겪으셨던 대중과의 괴리감, 그리고 오늘날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진득한 감상'보다는 '즉각적인 도파민 충족'으로 변해버린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에는 저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창작자가 공들여 쌓아 올린 시간의 가치를 단 몇 초의 자극으로 평가절하하는 일부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영화 <대홍수>에 대한 대중의 혹평을 단순히 "요즘 관객들이 참을성이 없어서", 혹은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악플을 다는 배달 앱 리뷰어 같아서"라고 치부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리고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먼저 '불친절함'과 '못 만든 것'은 다릅니다.
작가님은 <유전>의 사례를 들며, 시대를 앞서간 명작이 당시에는 이해받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대홍수>를 <유전>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유전>은 오컬트 장르의 문법을 비틀고 파괴하며 '낯선 공포'를 주었기에 호불호가 갈렸지만, <대홍수>가 받는 비판은 그 결이 다릅니다.
이 영화는 난해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상황을 납득시키는 연출의 디테일이 부족했기에 '불친절'했습니다. 감독의 의도가 심오해서가 아니라, 그 의도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이 헐거웠기 때문입니다. 불친절함이 미학이 되려면 그 끝에 관객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저 관객을 밖으로 내밀어버렸습니다.
또한 상업 영화의 미덕은 '공감'과 '설득'입니다.
독립 예술 영화가 작가주의적 고집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넷플릭스 등을 통해 공개되는 상업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수익은 곧 관객의 선택과 추천에서 나옵니다.
"이 영화 재미있어, 꼭 봐"라고 추천할 수 없는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의도는 알겠다"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뻔한 클리셰가 범벅이 되어 있는데 전개마저 불친절하다면, 관객이 느낄 것은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피로감뿐입니다. 이것을 두고 "관객이 도파민에 절여져서 진가를 모른다"고 탓하는 것은 창작자혹은 비평가의 오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은 '이야기의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작가님은 관객들이 '이야기의 비용'을 고민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훌륭한 서사, 긴 호흡을 가진 명작에는 기꺼이 시간을 쓰고 찬사를 보냅니다. <헤어질 결심>이나 <서울의 봄> 같은 영화들이 도파민만 쫓는 숏폼 콘텐츠라서 사랑받은 것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화를 내는 지점은 '시간을 들여 볼 가치가 있다고 믿고 투자했으나, 그 결과물이 기대 이하의 퀄리티(클리셰, 개연성 부족 등)였을 때'입니다. 이는 배달 음식에 비유하자면, 손님이 자극적인 맛만 찾아서가 아니라, 셰프가 "내 요리는 심오하니 맛이 없어도 참으라"고 덜 익은 음식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님의 말씀처럼 창작자가 대중의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뚝심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성도 부족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수준 낮은 관객의 아우성"으로 귀를 막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홍수>에 대한 혹평은 관객의 수준이 낮아져서가 아니라, 영화가 관객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불친절함'은 혁신이 아니라 아집일 뿐입니다.
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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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늘걷기
25.12.23 · 211.♡.9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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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파술머프
25.12.23 · 211.♡.10.2
대단히 설득력 있게 글을 쓰셨습니다. 공감 해요! -
CClarity
25.12.23 · 211.♡.150.125
저도 본문의 내용 쓰려다 말았는데 대신 써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시간이 지나서 평이 달라질 수 있을지언정 현시점에 못 만든 건 명백히 못 만든 것입니다. -
Rruler
25.12.23 · 221.♡.188.11
공감합니다.
흡사 니들이 예술을 알아 수준의 논리가 나올까봐 우려스럽네요. -
Nnice05
→ ruler
25.12.23 · 175.♡.18.168
허지웅씨의 평은 읽어보지 않아 그 양반에 대한 소린 아니지만,
전 영화 보는 내내, 이미 감독이 그런 마인드를 갖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티셔츠의 넘버링을 비롯해서, 이 정도로 알려주지 않으면 니들은 모를 거야 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물론 그거 보고 눈치 챈 면도 있긴 하지만, 아쉬운 듯한 복선과 암시로서, 해당 장면과 영화 전체의 주제에 대해 사유하는 가 재미를, 감독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범인은 절름발이다를 티켓팅 중에 들어버린 듯한......
저 영화에 대한 평이 3점대 였던 적이 있었다는 건, 결국 감독의 생각이 마냥 틀렸다고만 볼수는 없겠습니다만. -
폴폴스타
→ nice05 작성자
25.12.23 · 211.♡.90.197
티셔츠 등장부터 티셔츠 숫자 어디까지 올라가나 티셔츠만 보게되는 ㅠ -
CClarity
→ nice05
25.12.23 · 211.♡.150.125
저도 영화보는 내내 그런 느낌이였어요. 다른 작품에 나온 요소들 차용하면서 "나 이정도도 한다?"하고 자랑하는 느낌.. 그중에 백미는 전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본작의 스토리도 제대로 못 끌어오면서 우주까지 가버리는... 정말 영화가 우주에 가버렸어요. -
런런던쫄면
25.12.23 · 112.♡.206.53
맞아요.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좋은 영화는 플롯들의 연결이 지극히 자연스럽죠. 상징, 암시적인 장면 하나로 수백줄의 대사를 넘어서는 이해를 주기도 하구요. 별 다른 고민 없이....그냥 이것저것 다 때려 박으면 뭔가 하나 나오겠지....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잡탕밥 건더기에 카레소스를 깔고, 밥을 메밀면으로 대체하여 초장 듬뿍으로 데코레이션을 한 느낌? -
폴폴스타
→ 런던쫄면 작성자
25.12.23 · 211.♡.90.197
음식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요리 X도 모르네라고 하는 상황인데 공감이 1도 안됩니다 -
수수도로직
25.12.23 · 125.♡.113.104
허지웅씨는 대홍수가 나쁘지 않은 영화라는게 아니라... 아주 단편적인 한가지 논리 혹은 대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정당한 평가 이상의 비난과 혐오를 무책임하게 내뱉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어떤 평가를 '대중'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것에도 지친 느낌이었습니다. '대중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라는데 어디에서 어디까지의 어떤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분히 개인적인 느낌을 평해야 하는데 지나치다 느껴질 만큼의 비난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몰아치는것,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이라고 봤습니다만...
또 대중이 이른바 '환호'하는 영화의 완성도도 별 다를거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환멸을 느꼈을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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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용 영화고요.
누가 물으면 봐도 괜찮다고 했을 겁니다.
추천은 못하고요.
극장 개봉했다면 관람을 말렸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자될만한 영화가 아닌데 지금 현상이 조금 신기하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