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둘 (221.♡.151.108)
2026년 1월 6일 PM 04:25 · 수정됨(17:23)
라스베이거스 국제공항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네바다의 건조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마주한 것은 화려한 네온사인보다 먼저 들려오는 슬롯머신의 기계적인 전자음이었다. 누군가는 인생 역전의 잭팟을 꿈꾸며 레버를 당기겠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수 개월간의 밤샘과 수백 번의 수정 끝에 너덜너덜해진 ‘CES 202X 전시 운영안’ 뭉치였다.
셔틀버스를 타고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LVCC)로 향하는 길, 창밖은 이미 거대한 전쟁터였다. 경쟁사 S사는 전시장 외벽 전체를 수천 장의 디스플레이로 감싸 도시 전체를 자신들의 로고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혁신은 여기서 시작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사막의 태양 아래서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빛났다. 반면, 우리 회사의 광고는 전시장 입구 화장실 옆,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배너 한 칸을 간신히 차지하고 있었다.
“팀장님, 저기 보세요. S사는 이번에 전시장 안에 실제 인공폭포를 만들었대요. 물줄기로 메시지를 띄운다는데, 우리는… 저기 구석에 있는 저게 다인가요?”
옆자리 신입 사원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나는 대답 대신 손목시계만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인공폭포는 커녕, 전시장 바닥에 깔 카펫의 평당 단가를 5달러 아끼기 위해 전시 에이전트와 한 달을 싸웠다. 전시용 시제품(Mock-up)이 운송 도중 파손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박 전무는 수리비가 예산 밖이라며 “어차피 멀리서 보면 티 안 나니 조명으로 가려”라고 지시했다.
그 좁고 침침한 우리 부스 앞에 섰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곳은 기술을 뽐내는 장이 아니라, 자본과 화력의 차이를 잔인하게 확인시켜 주는 처형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단두대 위에 곧 우리 회사의 ‘절대 권력’ 김 회장이 오를 예정이었다.
전시 개막 첫날 오전 11시. 김 회장의 행렬이 부스에 들어섰다. 이미 아침에 경쟁사들의 부스를 한 바퀴 돌고 온 김 회장의 표정은 라스베이거스의 아침 햇살보다 차가웠다.
“이게 다야?”
낮게 깔린 목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실무자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김 회장은 천천히 부스를 돌았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실무자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3년 전 모델을 케이스만 갈아 끼운 ‘친환경 에너지 패널’은 칙칙한 조명 아래서 먼지가 쌓인 채 서 있었고, 메인 스크린은 해상도가 낮아 글자가 자글거렸다.
“옆 동네는 우주 정거장을 지어놓고 로봇이 춤을 추는데, 우린 왜 동네 전업사 꼴이냐고. 박 전무, 자네 눈에는 이게 혁신으로 보여? 내 눈이 삐었어, 아니면 너희 정신머리가 나간 거야?”
회장의 불호령에 전시장은 순식간에 영하의 동토로 변했다. 박 전무의 얼굴은 새하얀 마분지처럼 하얗게 질렸다. 부스 담당 팀장인 나는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었다. 회장은 한참 동안 벽면에 붙은 패널의 미세한 오타를 지적하며 독설을 쏟아붓고는,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폭풍처럼 사라졌다. 남겨진 우리에게 남은 건 절망과, 오늘 밤 안에 무언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존의 공포뿐이었다.
그날 밤, 호텔 스위트룸에서는 기술의 혁신 대신 ‘인식의 혁신’을 위한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박 전무는 노련했다. 그는 물리적인 부스를 바꿀 수 없다면, 회장이 세상을 보는 ‘필터’를 통째로 교체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모든 홍보 라인 동원해. 한국에 있는 매체들, 우리가 광고 집행하는 곳들 다 연락해. 기사 키워드는 세 개다. ‘실용주의’, ‘본질’, ‘진정성’. 옆 동네는 겉멋만 든 쇼고, 우리는 내실 있는 혁신이라는 프레임을 짜.”
홍보팀은 비상이 걸렸다. 새벽 내내 한국의 기자들에게 국제전화가 걸려 왔고, 광고 계약을 미끼로 한 ‘협조 요청’이 쏟아졌다. 다음 날 아침, 김 회장이 깨어나는 시간에 맞춰 그의 태블릿에는 정교하게 조작된 ‘가짜 승전보’들이 도착했다.
[현지취재] “화려한 쇼는 끝났다”… 글로벌 바이어들, XX사의 ‘진정성’에 발길 멈춰CES 202X의 숨은 승자, 김 회장의 ‘실용 중심 경영’이 빛났다
조식 테이블에서 기사를 읽는 김 회장의 미간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박 전무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곁에서 속삭였다.
“회장님, 보십시오. 현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반응이 뜨겁습니다. 경쟁사들의 화려한 전시는 알맹이 없는 ‘돈 잔치’일 뿐이라며, 오히려 우리 회사의 현실적인 솔루션에 진성 바이어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어제 보신 그 칙칙한 조명요? 외신 기자가 그러더군요. ‘눈의 피로를 최소화한 인간 중심적 설계’라고요.”
“그래? 조명이 어두운 게 그런 뜻이 있었어?”
“그럼요. 과한 조명은 기술에 자신 없는 놈들이나 쓰는 법이죠. 회장님의 ‘절제 미학’이 통하고 있는 겁니다.”
셋째 날부터 홍보팀의 기술은 극에 달했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경품 증정 시간에 맞춰, 광각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가 부스를 훑었다. 사진 속 우리 부스는 인산인해를 이룬 테크의 성지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공짜 에코백을 받으러 온 학생들과 근처 식당 전단지를 돌리러 온 사람들이었지만, 보고서에는 ‘미래 기술을 선점하려는 글로벌 인파’로 기록되었다.
김 회장은 점차 자신의 눈보다 텍스트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부스를 돌며 마주치는 실무자들에게 “기사 봤어? 우리 방식이 맞았어. 서구권 놈들이 역시 안목이 있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불과 이틀 전, 부스가 후지다며 서류철을 던지던 노인은 사라지고, 자신의 혜안으로 세계를 정복한 ‘승리한 군주’만이 남았다.
귀국 후 본사 대회의실. 전사 임원들이 모인 가운데 ‘CES 202X 성과 공유 경영회의’가 열렸다. 회의실 벽면에는 **‘세계를 사로잡은 압도적 기술력, XX의 이름으로’**라는 거창한 현수막이 걸렸다.
대형 스크린에는 편집의 마술이 부려진 영상이 재생되었다. 텅 빈 부스는 ‘여유로운 프리미엄 라운지’로, 지루한 패널 설명은 ‘깊이 있는 기술 전달’로 둔갑했다. 배경음악으로는 웅장한 교향곡이 깔렸고,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된 관람객들의 표정은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들처럼 경건해 보였다.
영상을 끝낸 김 회장이 위풍당당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 CES에 가서 내가 느낀 게 많아. 남들 다 하는 로봇이니 AI니 하는 뜬구름 잡는 쇼, 그거 다 소용없어. 우리처럼 본질에 집중하니까 전 세계가 알아주잖아. 기사 봤지? 우리 부스가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이었어. 역시 우리 직원들이 최고야. 내년엔 이 방향으로 예산 더 증액해서 더 크게 가자고!”
우렁찬 박수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현장에서 먼지를 마시며 “볼 게 없다”는 관람객의 비아냥을 직접 들었던 나조차도, 순간 ‘내가 진짜 대박을 쳤던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박 전무는 옆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은 연기라기보다, 자신이 만든 거짓말에 스스로 감동한 광신의 모습이었다.
(에필로그)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로 향했다. 인트라넷 메인에는 김 회장이 웃으며 사장단과 악수하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켜 클라우드 비공개 폴더를 열었다. 그곳엔 박 전무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기록들이 잠들어 있었다.
[X-파일 01: 관람객의 실체] 보고서의 ‘5,000명 방문’ 중 4,000명은 부스 내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무료 커피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었음. 나머지 1,000명 중 상당수는 출구로 향하는 지름길로 우리 부스를 가로질러 갔을 뿐임.
[X-파일 02: 외신 극찬의 출처] 회장님이 감동했다는 ‘혁신적 미니멀리즘’ 기사는 홍보팀이 건당 500달러를 주고 의뢰한 동남아 소재 유령 블로그의 게시물임. 조회수 12회 중 10회는 우리 홍보팀의 클릭임.
[X-파일 03: 기술의 진실] ‘절제의 미학’이라 칭송받은 어두운 조명은 현지 시공팀과의 소통 오류로 전력 설계가 잘못되어 조명의 절반이 나간 사고였음.
나는 메일 창을 열어 수신인에 ‘전체 임직원’을 입력했다가, 이내 손가락을 멈췄다. 화면 속 김 회장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는 이제 자신이 만든 제품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다고 믿는 성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이 회사가 파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 임원들은 회장에게 안도감을 팔고, 회장은 주주들에게 환상을 팔며, 주주들은 자신들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산다. 나는 그 거대한 연극의 무대 뒤에서 소품을 닦는 광대일 뿐이다.
“팀장님, 회장님이 지시하신 ‘내년도 혁신 가이드라인’ 초안, 오늘 중으로 가능하시죠?”
신입 사원의 목소리에 나는 스마트폰을 껐다.
“응, 줘야지. 아주 감동적이고, 세상에 없던 혁신적인 문장들로 채워서 줄게.”
나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는 잃은 돈을 잊게 만들지만, 우리 회사의 CES는 실패한 현실을 지우고 가짜 승리를 박제한다. 나는 오늘 다시 실존하지 않는 승전보를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것은 나의 직업 윤리이자, 이 거대한 신기루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생존법이다.
사막의 신기루는 해가 지면 사라지지만, 기업의 신기루는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남는다. 나는 그 신기루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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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h22
01.06 · 39.♡.28.147
너무 재밌는데요? - 푸
푸른미르
01.06 · 118.♡.2.51
어우,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ㄷㄷ
김회장님이 눈앞에 어른거리네요 -
흐흐린기억
01.06 · 211.♡.205.81
너무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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