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Kay (222.♡.47.97)
2026년 1월 20일 PM 04:10 · 수정됨(20:05)
뭐 제가 제 얘기를 하는 거니까 좀 팔이 안으로 굽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직장이든 사회생활이든 시간 약속을 제법 잘 지키는 편이었습니다. 뭐 9시 출근이면 몇 분전까지 나오는게 맞는거냐 같은 ㅋㅋㅋ 그런 얘길 하려는 건 아니고요. 사회초년생일 때도, 장 직급을 달고 나서도, 일찍 나오진 않더라도 지각을 하진 않았죠.
또 저는 고등학생 때 읽은 이문열 삼국지에서의 유비 에피소드인 '상산초옹'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인의의 본질 같은거. 이 이야기를 모르시면 이런 얘기는 분명 읽으셨을 겁니다. 중세시대 저명한 유럽의 화가 미켈란젤로가 성당 천장 안보이는 구석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리니, 친구가 그걸 누가 안다고 그렇게 열심히 그리냐고 묻자 대답한 얘기 말입니다. "내가 안다네".
그 이후 십수년간 한 직장에서 일한 뒤 안 좋게 그만두고, 그 일한 것이 물경력이라는 현실을 알게 되고, 다음 직장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고 해고에 가깝게 그만두는 3년을 보냈습니다. 2년 전 새로운 직장에 와서도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불투명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이직을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나이도 차고 그래서 그런지 쉽게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지각을 자주 합니다. 몇 십분 이런 건 아니지만 1-2분 늦는 건 예사입니다. 운이 좋아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면 업무 준비를 한다거나 스몰톡을 했었지만, 요즘은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오늘도 반은 사실 반은 핑계로 아프다는 말을 하고 회사에 연차를 냈습니다. 작년도 거의 연차를 다 사용했습니다. 저는 요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지시 받은 내용까지는 책임감 있게 하되, 먼저 일을 찾아서 하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은 일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굳이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처음 만난 타인에게는 친절하려고 노력합니다. 한 때 제 사수가 가르쳐줬던, "가족을 제외하고 한 주간 가장 많이 보는게 직장동료다" 라는 말은 이제 되뇌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이니 타인에게 하는 친절 이상을 베풀고 싶지도 않습니다. 직장에 와서 알게 된 이상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어도 친절하고 사려깊고 태도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저를 보면 제가 누군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 겪었던 허무주의 혹은 뭐 번아웃 같은 것과는 다른 공허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문제가 뭘까 하는 고민을 요즘 계속 하고 있습니다.
남들은 안정감도 느끼고 유혹받지 않는다는 나이라는데 저는 왜 이러는 걸까요.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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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unki
01.20 · 14.♡.1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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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늘파랑
01.20 · 183.♡.207.34
저도 이번이 세번째 직장인데 개인 물품은 최소화하고 회사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Kkmaster
01.20 · 1.♡.134.157
저도 40대 후반 들어서면서 공허감이 너무 심해서 일이고 취미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짜증만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신과에서는 우울증이라는데 약 먹어도 별 효과가 안보이네요
그냥 살아간다는것 자체가 재미가 없어요 밥먹는것도 귀찮고 눈감고 잠들면 그냥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다 라는 생각만 드네요 -
팟팟타이
01.20 · 210.♡.3.154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방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런 내용을 캡쳐해뒀거든요. ㄷㄷㄷ
(크게 도움되진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 첨부해봅니다)
[https://s3.damoang.net/data/editor/2601/3db2791.jpeg]
출처 : 주도성과 진로교육
[https://s3.damoang.net/data/editor/2601/40cb369.jpeg]
[https://s3.damoang.net/data/editor/2601/3967f61.jpeg]
출처: 공허의 시대 -
므므냐넌
01.20 · 106.♡.27.232
번아웃으로 볼 수도 있을듯 한데 가치관 붕괴? 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는 글쓴님이 현재 도덕적 해이에 빠진 것이 아니라, 심리적 생존을 위해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고 있는 상태 아닐까요. 스스로를 지각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기보다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작성하신 내용의 미켈란젤로처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완벽하게 칠하느라 자신이 소진되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해 보이기도 하네요.
가치관으로 접근해봐도 말씀하신 내가 기억이 안난다는건 내가 믿던 가치(친절, 사려깊음)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상태라고 생각해도 될 듯 합니다.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는 작은 루틴부터 다시 해보면서 내가 기억하는 모습을 다시 찾으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나만이 알 수 있고 나만이 만족할 수 있는 작은일이요. 우선 남의 시선, 그리고 불혹이 주는 부담감을 좀 덜어내시고 자신을 먼저 찾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사실 저도 고민이 많은 사람이라 ㅠㅠ ) -
김김오우무아
01.20 · 203.♡.220.25
저도 서른부터 시작한 일 오십가까이 하다가 잘 마무리 하며 퇴직하고....이직한 직장에서 같은 일 하다가 대표 갑질과 괴롭힘으로 퇴사하고 노동부 진정 넣어서 체불된 임금 받고나니...이후 부터는 트라우마 때문인지 정규직으로 일을 하기가 싫더라구요. 그래서 요즘은 시간제나 계약직으로 일하며 제 몸과 정신 건강 챙기고 있습니다. 모아놓은 재산은 많지 않지만 빚은 없으니 살아지네요. -
숀숀화이트팤
01.20 · 125.♡.111.106
번아웃 맞아요.
심한 번아웃이 아니라면 지금 하시는 것만 해도 괜찮아요
다 지나가고 돌아옵니다.
근데 지각은 하지 마세요.
이건 마지노선 같은거에요. -
가가랑비
01.20 · 223.♡.95.223
지극히 정상입니다.
일단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하실 필요 없겠습니당. -
가가랑비
→ 가랑비
01.20 · 223.♡.95.223
그렇게 쭉 지내셔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곧 이유를 찾고, 마음과 일 등에서 새로운 길을 찾거나 현재를 더 다지면서 생활하실 것 같습니다.
고민은 하시되, 화살표를 자기 자신을 향하지는 마세요.절대로. ㅎ -
두두부1
01.20 · 121.♡.128.93
저는 곧 불혹입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지금은 저를 좀 알아보려고 하던 일 그만두고 전혀 상관없던 요가 강사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명상하고 있는데요.
마음 공부 하면서 그동안 사회생활 해오면서 어렴풋이 느끼기만 하고 구체화 시켜오지 않던 불편함들이 개념화 되면서 정리되더군요.
결국 내가 생각해오던 이상적인 나와 사람들의 관계는 회사에서는 이뤄지기 희박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계약으로 만난 사람들이니까요.
그럼 일상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은데
현대 수도권 도심에서 그런 관계를 만나기 힘들긴 합니다만, 찾아보면 마을 공동체같은 곳들이 도움 되실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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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에 의해 움직이는것 외에 나를 나타내는 것들 - 사적 약속이라든지, 지인들 만남이라든지 - 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괜찮을 듯 합니다.
사실, 내가 괜찮다면 뭘 해도 상관 없겠지만 바꿔말하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괜찮지 않다 여겨서 행동이 그렇게 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