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여행자 (110.♡.95.20)
2026년 1월 25일 PM 07:14 · 수정됨(01. 26. 00:43)
우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요. 그분이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이해찬 전 총리가 민주진영에 미친 영향력과, 그 영향력이 얻어낸 결과를 잘 알고 있기에
우선 민주진영을 오랜동안 지지해온 사람으로써 그의 통찰력과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를 보냅니다
저는 흔히 말하는 이해찬 세대 입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참 시끄러웠죠. 정부는 공부 못해도 대학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언론에서는 연일 애들 성적 떨어진다고 대서특필을 하고, 부모님은 혼란스러워하고, 학원 선생님들은 신경 끄고 공부나 하라 몰아치고...
물론, 제일 혼란스러웠던건 당사자인 저였을 겁니다. 특기만 있으면 대학교 갈 수 있다는데, 저는 특기가 없었거든요.
학생때 가끔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서류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꼭 '특기'란이 있었는데, 저는 항상 그 칸채우는 것에 곤란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친구들도 비슷비슷 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특기'가 있는 사람은 없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애초에 특기란게 뭐였을까요. 우리에게는 오직 '성적'만이 우리를 정의하는 유일한 특기 였는데 말입니다.
한반에 3~40명이면 1등부터 40등 까지의 '성적'이 있습니다. 가끔은 이름 대신 성적으로 우리를 부르기도 하는 선생님의 지도아래, 우리는 성적을 통해서 정의됩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 공부를 못하는 친구. 드물게 축구를 잘하거나 만화를 잘 그리는 친구도 있지만 대개 그들은 대게 [공부는 못하는데 뭐뭐는 잘하는 친구] 정도로 평가 받고는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정의는 생각보다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집니다.
'1등 부터 40등'은, 전교로 가면 '1등 부터 400등'이 되고, 전국으로 가면 '1등 부터 600,000등'이 됩니다. 수능장에 들어가면 재수하는 형님 누님들 까지 800,000명이 훌쩍 넘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유일무이한 등수라는 숫자 옆에 찍힙니다. 이른바 순위표 지요. 그저 그 순위표의 위쪽에 위치하는 것 만으로 나의 미래가 보장되고, 그 순위표의 아래에 이름이 있는 이들은 인생 낙오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제가 '학생'이었을 때 세상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 순위표의 적당한 상위권에 포함되어 있는 것있으로 질풍노도의 시기에 제 자의식을 안정되게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세상의 안전한 쪽 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생각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후였습니다.
제가 사회에 나와서 마주한 세상은, 사회에 공급되는 노동자들에게 한가지 능력을 요구합니다. '문제해결 능력'. 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세상은 이미 잘 굴러가는 시스템이고, 우리 노동자들의 역할은 끊임없이 시스템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죠. 시스템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문제 해결 능력이 높은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창의적인 인간보다는 정해진 방식의 학습을 잘 따라가는 사람, 정해진 문제인 시험을 잘 치를 줄 아는 사람들이 문제 해결능력이 높다고 평가 받는거죠. 시스템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사회의 엘리트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긍정적인 평가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공부 잘 하니까 사고 좀 쳐도 된다. 공부 잘 하니까 성격 좀 나빠도 된다. 저런 사람들이 수만명을 먹여살리니까, 그들을 추앙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점점 발전하면 사회는 복잡해지고는 세분화 됩니다. 점차 기존의 시스템 만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문제를 재정의 해야 하고, 가끔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때로는 시스템 없이도 상황을 돌파해 내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 - 우리가 추앙하던 능력 - 만으로는 그것을 따라가기가 힘들어지죠.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순위표의 최상위 권에 있었던 이들 - 이른바 법조계나 행정 엘리트들 - 이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를 끝장 낼 뻔 한 지난 몇 년을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서 구축해 낸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현재의 사회를 망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양성이 지금보다 훨씬 높게 평가 받아야 했습니다. 1등부터 80만등 까지의 순위로 사회를 구성하는 대신, 더 다양한 방식으로 인재들이 평가받고 그들이 훨씬 더 높게 평가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권력이 분산되고 권위가 분산되어 사회가 더욱 더 다양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적어도 '공부 잘 했으니까 나라도 잘 다스리겠지' 대신 좀 더 다른 사고방식으로 우리의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자연스럽게 사회를 구성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고인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이른바 이해찬 세대에 고인이 기대했던 것은, 우리를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존중해 주면,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때 우리 사회가 좀 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을 겁니다.
단순히 특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평가를 받고 존중을 받으면,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단단한 자존감을 가지고 세상에 나올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좀 더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로 우리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랬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튼튼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와 의지가 고인에게는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진보지요.
저는 고인의 그 의지가, 진정으로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저는 그래서 고인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그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자존감과 능력을 주려고 했던 정치가였고, 사회를 단단하게 만들려고 했던 행정가였습니다.
민주 진영이 그에게 받은 것은 셀 수 없이 많으니 그것은 민주진영 전체가 그에게 감사를 보내겠지요.
제 개인으로 그에게 보내는 감사와 추모는 이렇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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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자바람연꽃
01.25 · 121.♡.17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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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번째여행자
→ 사자바람연꽃 작성자
01.25 · 223.♡.213.196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가장 어두운 시기에 빛나는 분들이 계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를 빛낼 수 있을지, 혹은 우리 시대를 빛낼 이들을 잘 찾아내서 지지할 수 있을지... 위대한 유산을 후대로 넘겨야 하는 우리의 책임도 막중할 것 같습니다. -
남남매아빠
01.25 · 118.♡.14.109
이해찬 세대의 한사람으로서 그의 생각은 우리세대의 민주적 사고로 증명되었다고 봅니다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이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죠 민주당 4050 지지율에 모든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
두두번째여행자
→ 남매아빠 작성자
01.25 · 223.♡.213.196
그들이 그린 세상이 이제 왔고, 우리는 그 세상을 후대에 전해줘야겠지요. 1020세대를 향한 희망과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
아아무개00
01.25 · 178.♡.142.161
구구절절히 공감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두두번째여행자
→ 아무개00 작성자
01.25 · 223.♡.213.196
읽어주시고 곰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슬픔을 함께 다독여 견디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
아아무개00
→ 두번째여행자
01.25 · 178.♡.142.161
저는 이해찬세대 다음 세대이긴한데.. 한국의 공교육에 충실히 따르고 나름 좋은 결실도 맺고 헬렐레하며 대학 다니다 유학간다고 덥석나오고 첫 수업때 충격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나에게 있던 비판적 사고라는게 사실 굉장히 한정되어있던거구나.. 를 태어나서 처음 느꼇달까요.
해찬옹 그 당시에 비판도 받았지만.. 한국의 고질적인 공교육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누군가는 해야만했고, 대학과 줄세우기식 기득권이라는 태산과 같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실천까지 하셨죠. 제가 직접 해찬옹과 맞닿은 세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추구하셨던 가치가 지금의 그 당시 세대에 아직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두번쨰여행자님 글에 더욱 공감이 갑니다.
하이고 오늘 참 황망하네요ㅎㅎ..별 소리를 다 합니다. 다들 몸 잘 추스리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십쇼. - 헤
헤드라이너
01.25 · 203.♡.251.188
정말 70~80년대 항쟁하던 어른들이 지고 있습니다. ㅜㅜ 정말 감사할 따름이지요..ㅜㅜ -
두두번째여행자
→ 헤드라이너 작성자
01.25 · 223.♡.213.196
감사를 보내며, 이제 어른이 된 우리도 할 수 있는 걸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ㅠ -
다다모앙조앙
01.25 · 218.♡.158.16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평안히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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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이자 철학자 였던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이 바랬던 세상에 조금은 가까이 가지 않았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