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리 (220.♡.178.21)
2026년 1월 29일 PM 08:41 · 수정됨(23:16)
부동산 뉴스가 첫 꼭지로 나오는 MBC 뉴스를 틀어놓고 부동산 시장이 좀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귤을 하나씩 집어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협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에 문자가 떠서 진동이 느껴졌어요.
“딸 뭐해. 설에 언제와?”
설날까지는 아직 2주나 더 남았는데, 나이 50을 넘기고 다 큰 아이 둘을 키우는 당신 딸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나 봅니다. 일정을 다시 훑어보고, 친정집 가는 날짜를 짧게 적어 빠르게 답장을 보내드렸어요.
아빠는 올해 86세 입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아 세상의 소리를 담아낼 수 없으니 대화는 점점 짧아지고 있고, 최근 고관절 수술을 두 번이나 한 뒤로는 몸이 눈에 띄게 쇠약해지셨습니다. 보조 기구 없이는 몇 걸음 떼는 것도 쉽지 않구요. 예전엔 늘 바쁘고 호탕하고 단단하던 분이었는데, 세월이 참 야속할 뿐입니다.
문자를 보내고 다시 귤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아빠가 젊었을 때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가 생각났어요. 회식이 있던 날이면 달달하게 술에 취해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시던 길에 아빠는 빠지지 않고 까만 비닐봉지 안에 귤을 사들고 오셨어요. (가끔씩 생강맛이 느껴지는 센베이 과자도 다른 봉지에 들어 있었구요.) 그렇게 별 말 없이 식탁 위에 올려두던 귤 봉지에는 아빠의 하루치 피로, 그리고 술기운에 가려진 가족을 향한 애정이 함께 담겨 있었던 거 같아요.
저는 귤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마 과일 중 가장 많이 먹은 것도 귤인 거 같아요. 새콤달콤한 매력적인 맛에, 값이 비싸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계절도 길고, 칼없이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껍질을 까서 입에 넣을 수 있고, 한 알 한 알 떼어내서 너 하나 나 하나 주고 받으며 먹기에도 참 좋구요. 이렇게 정다운 과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올해도 귤을 많이 먹었더니 손바닥에 귤빛이 배어 있는 게 보이네요.
그런데 가만히 거슬러 올라가 보니, 제가 좋아하는 귤에 아빠의 기억이 함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취기 가득한 아빠 얼굴, 늦은 밤, 까만 봉지, 식탁 위에 놓인 귤...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시간이 되어 동화 속 그림처럼 마음 한쪽에 남아 있었네요.
나의 아빠, 아버지, 오래 건강하세요.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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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아
01.29 · 49.♡.162.148
글이 참 따뜻합니다. 부러운 글이기도 하네요..^^ - 그
그레이스리
→ 단아 작성자
01.29 · 220.♡.178.21
귤 좋아하시죠?^^ 편안하게 밤시간 보내세요. -
HHymn
01.29 · 211.♡.192.127
나이가 드니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어젯밤 귤이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 나갔다왔었어요.
이런 사랑 안에 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따뜻한 글 고맙습니다. - 그
그레이스리
→ Hymn 작성자
01.29 · 220.♡.178.21
저도 부모님의 마음이 살면서 순간순간 느껴져요. 그러면서 남편의 마음도 읽히구요. 좋은 아빠시네요^^ -
Bbooknbeer
01.29 · 61.♡.162.10
귤 한봉지 겨울에 부담없이 많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죠 이불속에서 까먹으면 행복했어요 - 그
그레이스리
→ booknbeer 작성자
01.29 · 220.♡.178.21
요즘 귤값도 비싸졌어요. 그래도 다른 과일에 비할 수가 있을까 싶어요. 이불속 귤까먹던 풍경, 저도 잘 압니다! -
RRania
01.29 · 211.♡.201.46
귤을 너무 사랑스러운 과일로 만드셨네요.
부친께서 작성자님 곁에 건강하게 오래 계시길 저도 바랍니다. - 그
그레이스리
→ Rania 작성자
01.29 · 220.♡.178.21
삶이 유한한 것이 좋기도 하고, 한편 아쉽기도 해요. 저는 귤이란 이름 자체도 너무 예쁜 거 같아요. 뭔가 정체를 알기 어렵고 그래서 신비로운 느낌이에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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