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어 선생님의 왕사남 후기 (퍼옴)
HAKO

Lv.1 HAKO (14.♡.186.97)

2026년 2월 24일 PM 02:10 · 수정됨(17:13)

조회 3,044 공감 0

저도 극초반에 본 입장에서 왕사남의 흥행이 조금 의아해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마음 저 한 귀퉁이에 올려둔 따뜻함이 자꾸 곱씹어 지는 순간들이 있네요. 

역시 국어 선생님 답게 그 마음을 글로 잘 끄집어 내신것 같아서 가지고 와봤습니다. 



"단종이 죽자 엄흥도가 곡하고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고, 평 생 숨어 살았다." 역사는 두 줄로 끝내버린다.

역사책은 한 사람의 삶을 '사건'으로 요약한다.

그래서 우리는 국어에서 문학을 배운다.

기록에 남지 않는 시대의 공기, 사람의 표정, 밥상의 온도를 보기 위해서.

《왕과 사는 남자》는 그 문학의 일을 영화로 한다.

기록 사이에 숨은 시간을 감독의 상상으로 그려낸다.


요즘 영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과몰입하는 콘텐츠도 많고, 관객 수도 500만을 넘겼다.

오랜만에 한국이 "영화"로 들썩이는 느낌이 반갑다.

"너 그거 봤어?"의 '그거'가 가십이 아니라 작품이라서 좋다.

우리는 왜 이 영화에 열광할까?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요즘 우리는 사람보다 역할, 프로필, 성과와 만난다.

'나'보다 '나의 지위'가 먼저 보이는 시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사람들은 내세울 게 없다.

두메 산골 촌장 엄흥도와 가난한 평민들.

그리고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 단종.

우리는 이미 결말도 안다.

단종은 복위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사건"이 아니라 "사이의 시간"이 중요해 진다.


영화에서 단종은 엄흥도에게 묻는다.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다슬기 끓인 막동어멈, 산나물 캐온 윤노인, 글을 배우 는 태산이...

그리고 단종은 그들과 '이홍위'로 만난다.

"자네가 막동어멈인가. 내 다슬기 아주 잘 먹었네!"

"오라버니는 누구야?"

"나는 이홍위라고 한다."


이름을 부르고,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건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순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순간이다.

김춘수의 「꽃」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이 영화는 그 과정을 끝까지 보여준다.

유배 온 '양반놈'이 어느 순간 마을의 친근한 '나으리'가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이홍위의 삶에 스며든다.


이 영화의 핵심은 거대한 정치 사건이 아니다.

단종 복위를 위한 저항이 '메인'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건

유배지를 떠나야 하는 이홍위와, 관리자로서 갈등하는 엄흥도의 관계다.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떠나려는 이홍위 앞에서 엄흥도가 길을 막고 묻는다.

"저도 그 사람들(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에 포함됩니까?"

"그대는 아닌가?" 뭉클하다.

순수하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아끼는 그 관계에서 눈물이 난다.

역할, 프로필, 성과가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으로 채워진 생활의 사람 냄새가 그립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홍위가 죽을 때, 엄흥도는 '진짜로' 운다.

그래서 역사책의 단어 하나가 새로 보인다.

'울다'가 아니라 '곡하다!

곡하다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한 번에 무너지는 행위다.

우리는 이미 엄흥도와 이홍위의 시간을 봤기 때문에 그 단어 하나에 모든 날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결국, 관계다.

관계를 다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감정이 불러 일으켜진다.

영화에는 함께 밥상을 나누며 가까워지는 장면들이 나온다.

"밥 먹었니?"로 인사하는 한국인답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생활 공동체, 끼니를 나눈다는 친밀함이다.

'식구(食口)'는 먹을 식(食), 입구(口).

한솥밥 먹는 사이라는 뜻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어폰 꽂고 혼밥하는 게 익숙해진 시대지만, 가끔은 떠들썩한 밥상이 그리워진다.

그 소음, 대화, 눈 마주침.

김이 오르는 밥 냄새,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섞이던 웃 음.

이제는 조용한 혼밥이 익숙해졌는데도 가끔은 그 소음이 마음을 먼저 살린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밥이 아니라, 그 밥상에 있던 사람이다.

지금 떠오르는 식구가 있나요?

댓글 (13)

  • 채게바라

    채게바라 Lv.1

    02.24 · 36.♡.184.203

    읽으면서도 장면들이 떠올라 눈물 나네요. ㅠ
    개인적인 기준으로 그만하면 잘 만든 영화라 생각합니다.
  • Java

    Java Lv.1

    02.24 · 116.♡.70.94

    이글을 보니 왕사남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 또 흘러가는 유행이려니 했거든요.
  • 채게바라

    채게바라 Lv.1 → Java

    02.24 · 36.♡.184.203

    볼만합니다. 풍경도 이쁘고요.
  • 이퀄리티

    이퀄리티 Lv.1

    02.24 · 210.♡.41.89

    20대 초반 시절.. 친구 고향이 '영월' 이었는데.. 그래서 영월 고씨굴이라던지 청령포에 굉장히 자주 갔던.. 기억이...
    그리고 지금의 집사람과도 처음으로 떠난 여행이 영월이었고.. 청령포를 같이 갔었지요.. ^^;;

    왕사남도 보시고.. 영월 청령포 여행도 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고씨굴, 장릉(단종의 능) 도 있고.. 좋은 도시 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가시면 더더욱.. 좋을 듯.. ^^

    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윤석화 님의 '영영이별 영이별(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도 좋아했기에..

    내용이 더더욱 공감도 가고.. 그렇네요..
  • 욘마사

    욘마사 Lv.1

    02.24 · 118.♡.2.191

    아… 역시 문학샘다운 글이네요~ 정말 잼게봐서니 천만 기원해봅니다!!
  • peress

    peress Lv.1

    02.24 · 118.♡.25.206

    아 역기 국어선생님이군요. 글만 읽었는데도 막 회상이 되면서 눈물이 나려 합니다. ㅜ.ㅜ
  • 레메디스트

    레메디스트 Lv.1

    02.24 · 223.♡.81.105

    글 내용이 너무나 명문이네요 ~
  • 누가늦으래요

    누가늦으래요 Lv.1

    02.24 · 122.♡.0.185

    좋은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NothingTrue

    NothingTrue Lv.1

    02.24 · 210.♡.222.10

    이래서 국어를, 문학을 배우는 것인데...
    내 글솜씨는 왜 이모양인지...
    왕사남을 보면 눈물 흘렸던 장면장면이 떠오르는 좋은 글이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 레베카미니

    레베카미니 Lv.1

    02.24 · 221.♡.25.227

    글 감사합니다
    영화 보러 가야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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