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리언 (162.♡.90.206)
2024년 4월 1일 PM 06:16
이미 읽어보신 분은 경위를 파악하셨을 건데요.
원자탄 개발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앞서 있었고 또 지속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에 대한 핵공격을 하고자 했을 때, 미국은 협정에 따라 영국의 동의를 구해야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원폭의 실제 사용에 접하자 일반인들만 놀란 게 아니었죠.
견물생심으로,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돌변하게 됩니다.
양측은 치열한 암투를 벌입니다.
영국이 독일의 도전을 받아 등뼈가 부러진 상황에서 전대미문의 원자력을 두고 형성하는 관계였기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머리 싸움이 전개되었지만, 미국의 완력 앞에 갈수록 불리한 관계로 바뀌어 갔습니다.
새로운 양국 수뇌인 트루먼과 애틀리는 강력한 퀘벡협정을 느슨한 형태로 개정하기로 합의하여, 1945년 12월에
퀘벡협정의 폐기를 위한 초안이 양자 실무협의체에 의해 승인됩니다.
문제는 1946년 4월이 되자 추가 회의에서 합의가 불발이 되고, 트루먼과 애틀리는 전문을 주고 받으며 논쟁을 벌입니다.
트루먼은 자기가 서명한 코뮈니케에는 미국이 영국의 원자력발전소 설계, 건설 및 운영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발언하여, 애틀리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게 됩니다.
사실상 기술 협력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실제 쟁점은 우라늄 원광의 획득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미국은 1944년 9월의 비망록(Hyde Park Aide-Mémoire)를 통해 전후에도 핵협력을 지속한다고 해놓고는
막상 전쟁이 끝나니 1946년 미국 측은 즉각 법을 제정하여 "제한 정보"에 대한 통제를 이유로 기술 협력을 중단해버립니다.
심지어 미국 측은 해당 비망록의 자국 사본을 망실했다고까지 ...
이 와중에 미국의 비공개통제기구에서는 영국에 거부권이 있다는 원 협정 내용에 충격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트루먼에 엄청난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미국 여론은 핵독점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고, 계속 되는 협력 관계의 부실화는 영국 정부 관리와 과학자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퀘벡협정도 몰랐지만 하이드파크 비망록의 존재도 1급비밀이었던 관계로 그 존재를 몰랐던 미의회는
"제한 정보"에 대한 통제를 이유로 기술 협력을 중단하게 한 맥마혼법을 제정합니다.
1948년 7월에는 퀘벡협정을 잠정협정으로 대체하며, 당사국 사이 제한적인 수준의 기술 협력만을 허용하도록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미국은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대체를 통해 폐기하고자 했던 퀘벡협정이 자동으로 살아난 채로 한국전쟁을 맞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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