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헤일메리, 원작과 영화에 관한 잡설

Lv.1 미치 (211.♡.7.47)

2026년 3월 23일 PM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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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와 마션 영화 및 책의 스포에 대한 주의를 전혀 하지 않고 쓴 글입니다!

전 앤디 위어를 정말 좋아합니다. 마션이 처음 나왔을 때 첫 문장의 강렬함(!)에 호기심이 생겨서 책을 집었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고 막바로 원서를 사서 원서도 읽고, 영화도 개봉하자마자 달려가서 봤습니다. 앤디 위어 작품의 추구미는 이상적인 너드상입니다. 사회성 없고,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남들은 별 어려움 없이 수행하는 일상적인 활동이나 인간관계에 서툴기만 한 너드가 아니라,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무엇보다 인류애가 넘쳐나는 너드가 (너드와 비너드들이 뭉친 전지구적인 도움을 받아) 너드의 지식과 추론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한 이야기가 마션이라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그런 와트니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 받았으면서도 더 평범하고 더 입체적인 너드가 자기 자신, 전 지구 나아가 외계인과 외계 행성까지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앤디 위어는 미묘한 인간관계, 권력 관계로서의 사회 구조 같은 주제를 잘 다루지 못합니다(그래서 이런 요소가 좀 들어간 아르테미스는 평가가 별로인 것 같습니다). 마션에서도 그렇고 헤일메리에서도 그렇고 앤디 위어가 설정한 지구의 정치인, 석학, 군인들은 하나 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미국 중학생이 지루한 수학 수업 시간에 머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즐거워할 것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앤디 위어는 아주 영리한 두 가지 방법으로 이 문제를 피해갑니다. 첫째,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등장인물들을 '이상적인 극한 상황'에 몰아 넣습니다. 즉, 극도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지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전지구적인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등장 인물들이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현실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인간적, 사회적 갈등을 회피해도 작품의 개연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도록 이미 설정을 해놓았습니다. 마션은 물론이고 헤일메리에서야 뭐... 더 말할 게 없죠. 그래서 스트라트가 아무리 만화 주인공 같은 태도로 마구 월권을 해도, 중국 항공모함을 징발해서(!) 핵폭탄으로 남극 일부를 날려 버려도 독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오히려 누구나 중학교 때 한번 쯤 해봤음직한 그런 상상이 매우 개연성 있게 펼쳐지는 것이 유쾌하게 느껴집니다. 

 

두 번째 장치는 훨씬 확실하고 간단합니다. 앤디 위어는 플롯의 핵심이 되는 사건과 직접 상호작용하는 캐릭터를 단 한 명으로 설정하고 그 한 명의 1인칭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정을 해버리면 자칫 극한의 고립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심리 소설이 되어 버리거나,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해버리는 단순한 1인 히어로극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습니다.

 

전 여기서 앤디 위어의 진짜 재능이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앤디 위어는 대중들이 막연하게 어디서 들어는 봤는데 그게 현실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와닿지 않는 과학적인 지식을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 문제로 절묘하게 치환하고, 그 어떠한 슈퍼 파워도 가지지 못한 너드가 오직 과학 지식과 추론과 실험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장치를 아주 촘촘하게 심어놓음으로써 그 과정을 함께 따라가는 독자들에게 지적 호기심 충족, 추리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을 넘어 서사의 긴장, 반전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장 정서적인 감동까지 이끌어냅니다. 측정된 중력가속도 값에 그레이스와 함께 충격을 받고, 외계 생리학에 대해 자세히 배우면서 감동에 전율하고, 십 수 광년 떨어진 별의 광량 관측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장에 오열하게 만드는 재주는 아마 앤디 위어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장점을 극한까지 몰아 붙인 원작의 장점이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는 불가피하게 약간은 퇴색된 것 같습니다.

 

화성에서 감자 키우는 원예학 박사 이야기는 화성, 감자, 원예학에 대해 따로 깊이 있게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 자체가 주는 매력에 영화적으로 몰입하기가 쉽지만 타우 세티 항성계에서 외계인을 만나 아스트로파지 문제를 해결한 분자생물학 박사 이야기는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책은 인류 최초의 외계 생명 발견(아스트로파지), 당면한 전지구적 기후 위기, 항성간 여행, 인류 최초 지적 외계 생명과의 접촉 및 교류, 외계 행성 궤도 진입, 인류 최초의 외계 생명체 육종 같이 하나 하나가 독자적인 장르를 가지고 있을 법한 SF적인 대사건들을 아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풍성한 지적인 만족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리적인 요소를 곁들인 교차 구성을 통해 주인공의 캐릭터와 심리를 전작보다 훨씬 완성도 높게 묘사함으로써 결말 부분이 주는 감동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디테일들을 많이 쳐내고 서사를 그레이스와 로키의 버디 우주 활극에 초점을 맞추면서 너드미가 주도적으로 서사를 구축하고 결국에는 감동을 이끌어내는 구조였던 마션 책/영화, 헤일메리 책과는 달리 두 버디 간의 교감이 먼저 감정적으로 와 닿은 상태에서 SF에 올라타서 서사를 끌고 가는 구조를 채택함으로써 앤디 위어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매력을 어느 정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진짜 딱딱하고 진지하기만 한 하드 SF 영화로 연출했다면 그거야 말로 앤디 위어의 장점을 더 크게 훼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어쩌면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방향을 따라 가면서 낯선 존재와의 조우를 우정과 연대의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영화라는 매체에 더 어울리는 보편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앤디 위어의 팬으로서 소설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으로 가져오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마션과는 달리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원작에 없는 디테일 몇 가지는 영화만의 자산으로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라트가 노래를 하는 장면(무려 그 스트라트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 완벽한 선곡, 그걸 바라보는 멜로 전문 배우 라이언 고슬링의 눈빛까지, 원작에 빚을 지지 않은 영화만의 독자적인 설정과 연출이 가장 빛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립 A의 내부 모습 묘사(!), 저도 볼 때는 전혀 눈치를 못 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스트라트 목 뒤의 문신(결국 프로젝트 종료 후 프랑스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었다는 설정이라고 합니다)은 보고 나서도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번역가가 달라 붙어도 외국어 문학 작품을 한국어로 100% 번역해낼 수 없듯이, 완성도 높은 소설을 완성도 높은 영화로 각색해서 연출해내는 것은 어쩌면 그보다 더 어렵고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요구하는 작업입니다. 원문을 지나치게 직역하면 자칫 그 자체로 한국어 화자의 잘못된 이해를 초래할 수 있고 가독성에도 문제가 생기며, 지나치게 의역하면 원문에 담긴 의미와 뉘앙스의 상당 부분이 소실됩니다. 영화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 분명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작가 앤디 위어에게는 다시 한 번 깊은 존경과 애정을, 그리고 그 일부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어낸 제작진에게도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Movie good, good, good. 

Novel amaze, amaze, ama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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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 awful

    awful Lv.1

    03.23 · 118.♡.73.203

    저도 앤디 위어의 장점은 너드미가?? 극대화될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즉, 혼자 어딘가에 쳐박히게 될 ㄸ….

    이걸 어설프게 벗어나는 흉내를 낸 아르테미스는 넷카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였고요

  • NewJeans

    NewJeans Lv.1

    03.23 · 106.♡.131.88

    덕분에 책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1인으로서, 책을 이미 본듯한 간접적인 경험을 선사해주신 듯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영화를 먼저보고 책을 보아도 재밌을까요?ㅎㅎ

  • 미치 Lv.1 → NewJeans 작성자

    03.23 · 175.♡.176.139

    전 오히려 그 쪽을 더 추천합니다. 소설도 꼭 읽어보세요. 영화의 빈틈을 메워주는 걸 넘어 소설만이 가진 흡인력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입니다.

  • NewJeans

    NewJeans Lv.1 → 미치

    03.23 · 106.♡.131.88

    대댓글 감사합니다. 소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ㅎㅎSF를 워낙 좋아해서.. 엄청 반가운 작품이었는데..소설이 더 유명하더라구요.

  • 맛김치

    맛김치 Lv.1

    03.24 · 125.♡.186.94

    이동진이세요? ㄷㄷ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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