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426 (117.♡.5.156)
2026년 4월 1일 PM 06:05
며칠 전에 집안 어르신이 겪은 4.3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그 글에 "이승만은 개의 자손"이라는 댓글이 몇 개 달렸더군요. 4.3을 겪고서도 2찍을 하는 제주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습니다.
그래서 4.3이 발생한 원인, 수 만 명의 목숨이 희생된 비극의 주범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는 글을 씁니다.
첫번째 피묻은 손
먼저 4.3의 가장 큰 원흉은 미군정입니다. 미군정은 한반도에 진출할 때, 이미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닌 점령군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여운형 선생 및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협상에 따라 자진 무장해제를 하고 철수를 준비하던 일본군과 일본 경찰에게 현직으로 복귀해 무장하고 질서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본군은 미군정의 명령에 따라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서 미군 환영 행사를 하던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두 명이 사망합니다.
조선총독부는 항복을 앞두고 여운형을 협상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다고 예측하여 지하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고, 조선총독부가 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권력 이양과 안전한 철수를 위해 여운형과 협상을 했던 것입니다. 여운형과 건준이 해방 정국에서 한반도 내에 가장 영향력 있고 조직화된 집단이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이후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은 사실상 국내와 연락이 끊겨서 영향력이 거의 없었고, 임시정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건준을 배제하고 일본군과 일본 경찰, 친일파 세력, 한 줌의 친미파를 이용한 미군정의 정책은 처음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운형은 분명히 좌익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독립 운동 내부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혁명이 아닌 자유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해서 자주적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입장을 줄곧 유지했습니다.
제주도로 눈을 돌려보면, 제주도는 해방 직후 건준 계열의 인민위원회가 사실상 치안과 행정을 유지했습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 돈을 벌러 갔던 노동자들과 징용 귀환자들, 일본 유학생이 돌아와 젊은 인구가 크게 늘었는데, 그들은 열심히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했고, 좌파 성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대체로 온건한 성향이었는지, 남한 전역을 휩쓸던 총파업이나 좌우 충돌이 제주도에서는 거의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기존 친일 경찰을 중심으로 경찰력을 크게 확대하고 육지에서 추가로 경찰들을 파견해서 제주도의 좌파들을 탄압했습니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군중과 경찰이 충돌했고,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제주도 좌익 세력에서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졌고, 몇 차례 증폭 과정을 거쳐 결국 1948년 4.3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두번째 피묻은 손
이때 지금의 경찰청장 격인 미군정청의 경무부장이 조병옥이었습니다. 조병옥은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영어가 유창했고, 미군정의 신임을 받아 치안권을 손에 넣었습니다. 평화 협상을 주도한 군인들을 축출하여 강경진압파로 대체하고, 제주도에 서북청년단을 투입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제주도 출신 경찰들을 불신해서 육지의 경찰을 파견해서 제주도의 좌익 완전 소탕을 주문했습니다. 그 와중에 그가 한 말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제주도 인구가 20만인데, 20만 명 다 죽여도 좋다."
"왜정경찰을 등용해 공산당을 때려잡아라."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48년 8월 15일입니다.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분명 남한 정부와 이승만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미군정과 조병옥에게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갑니다. 조병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49년 말까지 경찰총수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조병옥은 누구인가?
조병옥의 주요 약력을 봅시다.
미국 유학생
기독교 신자
독립운동가
사업가
미군정 및 초창기 대한민국 정부의 경무부장(경무국장)
이승만 정부의 내무부 장관
대통령 선거 후보
앞서 미군정이 해방 정국에서 유일하게 조직된 세력인 건준을 배제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앞장 선 인물이 바로 조병옥입니다. 조병옥(과 한민당 일부 세력)은 기독교 신자이자, 영어에 능통한 기업가라는 신분을 이용해 미군정에 접근했고, 미군정을 상대로 여운형은 친일파라는 모략을 집요하게 펼쳤습니다. 친일파에 빨갱이라니, 미군정의 입장에서 바로 아웃이죠. 이 모략은 임시정부 인사들에게도 똑같이 되풀이해서 가해졌습니다.
이들(한민당 내부 우익 세력)은 극렬 반공 친미 우익 기독교라는 점에서 이승만과도 비슷한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하나 권력을 누가 잡을 것인지 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갈라섰습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중심제로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했고, 이승만 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지만 국내 토착 부르주아 세력은 의원내각제로 권력을 나누고 싶어했던 것이죠.
이승만의 일인 독재가 강화되면서 자유당 일부 세력이 떨어져 나오고, 한민당 출신들과 중도 보수 세력도 힘을 합쳐 드디어 우리가 아는 "민주당"이라는 당명이 우리나라 정치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병옥은 이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됩니다.
육지것들
비록 이승만 역시 4.3의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한 학살 책임자를 대통령 후보로 내보내는 민주당을 과연 제주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제가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아서 그저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독재자 이승만이냐, 학살자 조병옥이냐, 누구를 고르라는 거냐?", 저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조병옥이 죽었다고 이후 민주당에 대한 인식이 쉽게 바뀔 수 있을까요?
심지어 야당 세력은 박정희를 상대로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대통령 선거의 주요 전략으로 사용합니다. 제주도만이 아니라, 6.25 이후 연좌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당시에 박정희에게 동정적이었고, 진보 진영의 일부는 (좌익 전력 때문에 반공 매카시즘을 완화할 거라는 기대로) 박정희에게 지지를 보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더 오래 전 이승만 시절은 모르겠지만,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의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무소속 출마자들이 다수 당선됐다는 것입니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다음,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이 당에 갔다가 저 당에 갔다가, 다음 선거에서는 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하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박쥐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제주도에서 국회의원으로 배출되었고, 제주도민은 독재자에게 노골적으로 부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야당을 열심히 지지하지도 않는 기회주의적인 표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집단적인 기회주의는 생존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심리적인 거부감이 작동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기의 민주당이 지금 민주당의 역사의 일부임은 틀림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민주당을 기준으로 당시의 민주당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박정희 독재와 싸우는 과정에서 민주당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옛 민주당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극렬 친미+반공+기독교+지주+부르주아(+친일) 기득권 세력이 큰 뿌리의 한 가닥이었으며, 제주도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 역시 "그 놈이 그 놈"인 "육지것들"에 불과했습니다.
젊었을 때, 다른 제주도 출신 형들과 술을 마시면서, 왜 제주도에는 IRA나 바스크 조국과 자유 같은 분리주의 무장 투쟁 조직이 없는 거냐고, 씁쓸한 농담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은 이미 한라산 산자락에서 다 까마귀 밥이 된 거겠죠.
세번째 피 묻은 손
공식적으로 보고된 1만 여 명의 사망자 중 10% 가량은 토벌대가 아닌, 게릴라들에게 희생됐다고 합니다. 처음 4.3 봉기에 나선 사람들은 기껏해야 100에서 2~300 명 정도였고, 무장이라고 해야 일본군이 바다에 버리거나 땅에 파묻은 낡은 소총 수십 자루 수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악질적인 경찰이나 친일파 몇이 처단 대상이었겠지만, 토벌대와 싸우는 와중에 복수의 대상도 늘어나고, 살인을 살인으로 되갚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공격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들은 관공서만이 아니라 학교까지 불태웠습니다.
낮에는 토벌대가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치고, 밤에는 산사람들이 내려와 식량을 내놓으라고 죽창으로 찌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저 생존만이 최우선 과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강한 자에게 머리 숙여야 하고, 모난 놈은 저 혼자 돌을 맞는게 아니라 화를 불러오는 재앙의 근원으로 여기게 됩니다. "기회주의적인 생존 전략"이 모태에서부터 되물림되었습니다.
80년 서울의 봄에도 87년 6월 항쟁에서도 제주도는 평온한 평화의 섬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 정보기관 보고서에도 "제주도 이상 없음. 보고 사항 없음."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해서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을 거치면서 민주 정부들은 4.3과 제주도민의 명예 회복을 위해 애써왔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4.3은 국가의 폭력이며, 국가 폭력에 공소 시효는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가져왔던 민주당 진영에 대한 분노가 지금은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거기다 저보다 젊은 세대들은 아마 4.3에 대한 간접적인 고통 자체가 없을 겁니다.
민주당 정권의 노력과 세월의 세탁을 거치면서 요즘 제주도는 호남을 제외하면 가장 민주당 지지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 자신이 제주도를 떠난지 너무 오래 돼서, 지금의 제주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제가 이야기한 건 죄다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논문도 아니고, 개인적인 경험+간접 경험을 기반으로 한 감상 정도의 글이니, 너무 믿지는 마세요. 그냥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정도로 받아들여 주세요.
댓글 (1)
-
감감정노동자
04.01 · 211.♡.202.91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
제주 4.3을 비롯해서 잊혀지고 말하여지지 읺는 역사의 사건들을 자꾸 들춰내고 이야기하고 의견도 달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역사를 공부했다는 일부의 손에 놀아나면 일제가 산업화의 길을 딖아주었고 일본군 성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장사하러 갔다는 식으로 해석되고 말겁니다. 4.3을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