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lightened (118.♡.144.30)
2024년 5월 13일 AM 07:35 · 수정됨(05. 22. 01:32)
미국 내 대학들 중 학기제로 운영되는 곳들은 아마도 이번 주와 다음 주까지 대체로 기말고사와 졸업식을 끝내고 3개월간의 길고 긴 여름방학에 들어갑니다. (쿼터제 학교들은 6월 중순에서 말기까지 학사일정이 남았고요)
교수들은 숨가쁜 1년을 다 정리하고 비로소 숨 좀 돌릴 시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캠퍼스 공기가 많이 무겁습니다. 방학에 들어섰지만 캠퍼스는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이 예전처럼 느껴지질 않는 듯합니다. 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때문입니다.
제가 있는 학교는 이번에 어느 학교보다 격렬한 대립을 겪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대립통에 저는 한국에서 편하게 놀고 먹고 있었지만 학교 공식 이메일보다 레딧 포스팅을 통해 먼저 알게 된 시위대와 경찰의 충격적인 충돌 현장을 보는 내내 저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시위대 옆에 있었고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수들조차 무자비하게 끌고가던 경찰들은 제가 아마 그 학교에 임용된 후로 처음 보는 지극히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반이스라엘/친팔레스타인 시위를 억압해야 했는가. 명분은 학내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유대인 학생들이 안전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시위 내내 학내에서 유대 학생들을 향한 범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선제적으로 반유대주의의 분위기를 완전히 꺾어놓아야 한다는 친유대적 리더십의 위기감이 이런 사단을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많은 교수들이 격분했습니다. 마침 기말 시험 기간이라 얼마 남지 않은 2023-24 학년을 무사히 넘기기만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이번 일이 그냥 조용히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마스의 테러 이후 23-24 학년 인문대 수업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교수든 학생이든 간에 사실상 하나의 금기 주제였습니다. 하바드 총장도 유펜 총장도, 최근 코넬 총장도 청문회에서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교수들과 학생들을 옹호했다가 사임했습니다. 모양새는 사임이었지만 사실상 반유대주의를 자극했다고 보수 학부모와 기부자들이 총장을 쫒아낸 것입니다. 우리 학교도 그렇데 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고 한 달 동안 거의 매주 학장에게 이메일이 왔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러시아를 마르고 닳도록 씹었고 중국의 위구르 인권탄압에 저항해 매년 촛불 시위를 하던 것이 정의였던 우리 학교의 학내 분위기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학교가 마침내 기다리던 여름방학에 들어섰어도 교수들은 여전히 총장과 경찰 당국에 이번 사태 처리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 받기 위해서 계속 회의하고 연판장을 돌리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수들이 다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유대인 교수들의 반발이 심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묻어버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며칠 전 이 문제 관련 패컬티 미팅에서 주요 일간지에다 백악관에 보내는 공개 편지를 써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미 꽤 많은 교수들이 개별적으로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 오피니언에 이런 문제로 글을 썼습니다. 보수적인 학교 이사진과 총장은 교수들이 이 문제를 학교 밖으로 키우기를 극렬 반대하고 있어서 성사될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바이든이 지금까지의 친이스라엘 중심의 중동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그를 이번 대선에서 찍지 않겠다고. 그리고 너도 찍지 말라고.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너무나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제 탓이 아니라 순전히 제 양심을 자극한 바이든의 탓입니다.
ps: 혹시 제 수업에서 유대 학생들이 차별 받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맹세코 그 사람이 유대인이라서 의도적으로 불리하게 대우하지는 않습니다. 제 수업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과목이 없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유대 학생의 수행 평가에 문제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아주 가끔씩 중국/타이완/위구르/티벳 문제, 한일 식민주의 갈등 문제 등이 나올 때 사례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공개적으로 그러나 정중하게 토론합니다. 수업에서는 그걸로 끝입니다.
서명에도 적었듯이 저는 온라인 상에서 익명의 토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판과 충고는 자유로이 남기시되 예의를 지켜주세요.
댓글 (94)
-
ㄷㄷㄷㄷ
24.05.13 · 125.♡.23.70
바이든이 아니라 트럼프나 또는 공화당 누군가가 되면 달라질까요? -
EEnlightened
→ ㄷㄷㄷ 작성자
24.05.13 · 118.♡.144.30
이번에 바이든이 팔레스타인 문제로 젊은층의 표심을 잃어 정권을 잃게 되면 앞으로 미국의 대중동 정책 수립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시그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 혹은 비유럽계 이민자들의 숫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선거를 통한 이들의 목소리가 장기적으로 전통적인 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줄 거라는 (희망 섞인) 분석이 꽤 됩니다. 당장 트럼프는 고립주의를 택해 이 문제에서 빠지겠다고 한 상태입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친이스라엘입니다. 현대 미국 대통령의 역사에서 반이스라엘이었던 인물은 오바마가 유일합니다. 이것이 미국의 전통적인 입장입니다만 바이든이 이번에 대선에 지면 분명히 민주당 내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민주당의 발목을 잡고 있는 대선 이슈는 불법 이민자(국경 위기); 인플레이션;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입니다. 최근 조사에서 젊은 층이 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 유독 민감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고 바이든에게 반감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이든이 아직까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이들을 선택하는 것보다 전통적인 유대 자본과 영향력이 아직 더 큰 자산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밤밤고개커피
→ Enlightened
24.05.13 · 118.♡.4.204
트럼프가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으로 인정해서 팔레스타인 억압에 힘을 실어줬다는거 생각하면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싶어요. 다만 바이든의 학교 시위 개입은 좀 꼴불견인거 같습니다. 아 밑에도 비슷한 의견 남겨주신 분 있군요. -
LLV426
24.05.13 · 39.♡.223.199
참 어려운 일이군요.
근데 바이든은 그나마 이스라엘을 억제하려고 하는 편 아닌가요? 트럼프는 재임 중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해주고 여러 모로 네타냐후를 밀어준 것으로 압니다.
이스라엘 비판에 대한 현 정부의 억압을 이유로 트럼프 당선을 묵인한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더 큰 재앙이 닥칠텐데, 과연 이것이 양심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EEnlightened
→ LV426 작성자
24.05.13 · 118.♡.144.30
이번 일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더 이스라엘을 밀어준다면 그 때는 또다른 시위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만약에 바이든이 이번 일로 대통령이 못되면 트럼프도 맘대로 이스라엘을 밀어주기는 어려울지 모른다고 자위해봅니다. -
LLV426
→ Enlightened
24.05.13 · 39.♡.223.199
우리 도날드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란 거 다 경험으로 알지 않나요?
네타냐후가 바이든의 만류에도 저렇게 설치는 이유가 다음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이 유력하고, 자신들의 행동이 바이든을 궁지로 몰아서 트럼프 당선 가능성을 더 높일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추측이지만, 이미 트럼프 진영과 네타냐후는 물밑 접촉을 하고 있을 겁니다.
레이건이 아직 후보 시절이었을 때 이란과 접촉해서, 미 대사관 인질 석방을 늦추도록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EEnlightened
→ LV426 작성자
24.05.13 · 118.♡.144.30
동의합니다. 저 포함 모든 분들이 다 인정하고 계시겠지만 바이든이 되든 트럼프가 되든 미국의 친이스라엘 중동 정책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이 그렇다면 제 양심의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그게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
ㄷㄷㄷㄷ
→ Enlightened
24.05.13 · 125.♡.23.70
서명이나 글을 보면 학생은 아니신 듯 한데,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것이 예측되는 행동을 하신다니 좀 의외입니다. -
EEnlightened
→ ㄷㄷㄷ 작성자
24.05.13 · 118.♡.144.30
대선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는 아직 대통령이 아니고 대통령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설마 중동 문제 때문에 바이든 찍을 사람이 트럼프 찍겠어? 하고 저 같은 사람을 비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이든 캠프도 지금 그런 생각으로 학생 시위를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 6개월이나 남았습니다. 바이든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지금이 그를 압박해야 할 타임입니다. 저는 혼자이지만 저같은 사람들이 모이면 힘이 됩니다. 이 힘이 모여서 바이든에게 경고를 날리는 겁니다. 한 9월에서 10월쯤 되어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에게 밀리면 바이든이 그 때도 가만히 있을까요? 사과하고 읍소라도 할 겁니다. 그렇게라도 하라고 압박을 하는 거지요. 그럼 손을 놓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
ㄷㄷㄷㄷ
→ ㄷㄷㄷ
24.05.13 · 125.♡.23.70
네, 바이든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