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 벽에 남겨두고 온 영화 대사
아기고양이

Lv.1 아기고양이 (223.♡.73.178)

2026년 4월 6일 PM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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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호주에서 떠돌이(워킹홀리데이)생활을 할 때 무척 인상깊게 봤던 영화의 대사를 종이에 적어서 벽에 붙여둔 적이 있었어요.

인구가 몇 백 명 안되는 시골 동네에 밀 농장과 양 목장이 있는 곳에서 지낼 때였고, 로드하우스(휴게소)&모텔을 겸한 곳에서 판매되는 음식과 모텔 방 하나를 제공받고 일하던 때였죠.

마트 하나, 펍 하나, 은행 하나, 우체국, 학교, 도서관 이 정도 있었던 게 기억나는 작은 동네인데 더 싼 마트에 안 가고 로드하우스에 와서 음료나 담배를 사가는 단골아저씨들이 많았어요. 기름 넣는 김에 음료 사시는 분도 많았고 휴게소 음식이랑 치킨이랑 튀김 등을 판매하다보니 와서 식사하시고 왁자지껄 떠들다 가는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도 들었구요.

그 중에 양 목장 하시는 분도 계셨고, 사장님이 친한 단골 손님 한 분께 부탁해서 그 분이 저를 차에 태워서 양털 깎는 쉐드에 데려가주셔서 양치기 개가 힘겨워하며 양들을 몰아가는 모습부터 양털 깎는 거, 쇼 말고 진짜로 깎는 걸 바로 앞에서 보고, 어떤 순서로 깎으며 어떻게 가공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양털 깎으시는 분(이 분도 매일 오시던 분)이 저 보고도 깎아보라고 했는데 숙련자도 힘들게 깎으며 피 보고 꿰매고 하시는지라 제가 잘못 건드리면 큰 일 날까봐 무서워서 구경만 하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알게된 분의 배려로 밀 농장에 가서 밀 수확하는 콤바인? 엄청나게 큰 기계에 얻어타서 끝도 없이 펼쳐진 황금빛 밀밭에서 밀이 수확되고 탈곡되는 걸 본 적도 있었고, 그 곳에서 만난 분들이 모두 ‘이게 호주다.’라고 제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어서 여기 저기 잘 신세지고 다녔었네요.

일은 주로 매니저님과 같이 했었고, 다른 동료들도 있었는데 그 동네에서 제가 유일한 아시안이었고, 혼자 다니는 젊은 여성이라 로드하우스 사람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분들, 단골 손님들 모두 저를 보살펴주는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장님이 원래 호주 사람은 아니었고, 유고슬라비아 출신에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산다고 했었는데 일 끝나고 술 마실 때 외에는 자주 마주칠 일은 없었고, 친절하고 다정한? 젠틀한? 옆집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매일 오던 손님 중에 레게 머리를 한 독일인 청년이 인근 유명 관광지에 가봤냐고 묻길래 아무 생각없이 아니라고 했더니 같이 다녀오자고, 옆에 서 있던 매니저한테 쟤 휴무 좀 주라고 하면서 가자고 적극적으로 나오길래 거절하기도 어색한데다 저도 거기에 가보고 싶긴 했어서 같이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왕복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을, 전화도 안 터지는데 같이 다녀온 거였고, 그 녀석이 자길 믿고 같이 와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한테 꼭 얘기해달라고 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됐어서요.

그리고 어쩌다보니 로맨틱가이였던 이 녀석이 스토커로 변신했는데;; 그때 사장님이 경찰에 신고를 해주셨고, 출동한 경찰도 낯익은 얼굴, 단골이었습니다. 그만큼 작은 동네였어요.

제가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일을 했는데 얘가 저를 기다린다고 휴게소 앞에서 저녁 내내 축구공을 갖고 놀기도 하며 여러번 와 있었고, 방 앞에 엽서를 두고 가기도 하고, 인터넷 쓰러 간 도서관에서 쉬는 날 유명 관광지에 다녀오려고 검색하고 있는데 뒤에서 말 없이 지켜보다가 거기 갈 거냐고 말 걸어서 기겁하고 그랬었지만 다행히 얘랑 별 일은 없었고, 녀석이 일하던 농장의 밀 수확철이 다 끝나서 이 녀석이 먼저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곧 저도 여행 일정이 잡혀서 떠나기로 하고 2주 정도 남은 어느 날에, 평소에는 한 번씩 매니저님과 다른 동료들과 사장님과 같이 일 끝나고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이 날은 매니저님이 휴가 가서 안 계셨고 어쩌다 보니 사장님과 둘만 맥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혼자 드시고 계셨는데 제가 공중전화요금 아껴보겠다고 매장에 전화를 빌려쓰러 갔다가 같이 마시지 않겠냐는데 딱히 거절하기도 좀 그래서 마시게 된 거였습니다.

근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사장님이 그동안 제가 알던 친절하고 다정하고 선한 분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고, 큰 충격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날 아침 친구와 교회 할머니 한 분께만 말씀드리고 그 동네를 급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도시로 가는 버스가 매일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친구와 친구 남친이 일 다 제쳐두고 저를 도시로 데려다준다고 해서 급히 제 짐만 챙겨서 나올 수 있었는데 그때 벽에 붙여두고 미처 떼지 못한 종이에 적힌 영화의 대사가 오랜 시간동안 마음에 남아있었습니다.

Not everything is as it seems.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대사였습니다.

저는 뜨내기라 그 동네를 떠났지만, 같이 일하던 친구는 저를 돕다가(경찰에 신고 문의 넣었다고 다른 동료가 사장한테 일러서) 짤렸고, 이 일을 어찌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신세지던 할머니와 남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진정서?(complaint)를 어느 기관에 넣고 서류 하나 받는데 몇달 걸리고 그러다보니 시간이 한참 지나고 귀국 후에 합의금을 받고 끝냈습니다. 호주로 다시 와서 뭘 더 하라는데 그 일로 대인기피도 생긴데다가 불면증에 악관절 통증까지 심하게 와서 한창 고생을 했기에 뭘 더 어떻게 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도 부당해고로 신고를 할 줄 알았는데 그때 친구의 아버님이 투병중이셔서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듣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동네를 그렇게 떠나게 된 사건이 저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원래 그 동네 사람은 아니었고, 남자친구의 동네에서 살고 있던 거였는데, 친구가 알아보다 보니 그 전에 여러 여성 워홀러들이 거기서 일하다 짧으면 몇 주만에, 길어야 한 달 만에 저처럼 그만두고 떠났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런데 저처럼 문제 삼은 사람이 그간 없었기에 사장이 같은 짓을 계속 되풀이했다는 것을 알고 친구가 격분해서 그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얘길하고 소문이 퍼져나가서 불매운동이 펼쳐졌는지 그 사장은 업장을 넘기고 그 동네를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2년만에 휴가 때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들렀더니 정말 가게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권선징악의 결말이라고 해야할 지… 혹시 마주치게 되면 그때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지만, 그 사장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났다는 사실과 제가 그 곳에 있을 때도 보살펴주시고 떠난 후에도 연대해주신 마을 주민분들께 너무 고맙고 여러 감정이 벅차올라 휴게소 앞에서 한참 눈물을 쏟아내고 이 일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 영화 대사를 적어둔 건 그냥 우연이었는데, 그 대사가 적힌 종이를 벽에 붙여둔 채 나온 것이 곧 그 사장에게 닥칠 일의 예고였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스토커가 무슨 일 있음 얘기하라고 했던 게 혹시 그 사장에 대해 들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얘가 스토킹해서 한 번씩 저를 공포에 몰아넣고, 꼭 가보고 싶었던 유명 관광지도 못 갔지만, 얘가 지속적으로 제 주변을 얼쩡거렸기 때문에 제가 거기서 조금 더 오래 일하며 친구와 좋은 추억을 쌓는 기간을 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걸 깨닫고 나서 그 스토커에 대한 좋지 않았던 감정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는데 그 인상 깊은 대사가 나온 영화가 뭐였는지 계속 기억이 나질 않아서 한참을 찾았는데도 못 찾다가 오늘 드디어 영화 제목을 찾았습니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모나리자 스마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그때는 뭔가 강렬했으니 대사도 적어놨었겠죠.

댓글 (30)

  • 시커먼사각

    시커먼사각 Lv.1

    04.06 · 49.♡.218.16

    나쁜 일을 겪으셨었군요.. 그래도 마을 주민분들이 고맙네요.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지 않으셨기를 빕니다.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시커먼사각 작성자

    04.06 · 223.♡.73.178

    제가 믿고 아무 의심 없이 가장 먼저 털어놨던 옆 방 동료가 배신 때려서 친구가 짤리는 일이 있었지만 마을 주민분들이 연대해주셨더라구요. 그것만으로도 큰 힐링이 되었고 이 강렬한 경험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등을 바꾸게 해주었습니다만 아직 모지리입니다.^^;;

  • LV426

    LV426 Lv.1

    04.06 · 39.♡.223.199

    읽는 제가 다 무섭네요.

    남자들은 이런 공포 잘 모르지만, 치안이 좋다는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들은 무서운 경험이 한 번씩은 있는데, 외국에서 그것도 시골에서 도움 청할 곳도 없어서 더 무서우셨을 듯 합니다.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LV426 작성자

    04.06 · 223.♡.73.178

    저는 아무 개념이 없었는데 아는 할머니께서 시골에 가면 꼭 교회에 다니라고 하셔서 교회에 다녔는데 문제는 휴대전화가 안 터지는 거였어서;; 지금 같으면 못 갔을 것 같긴 하네요. 뭘 모르니 그러고 다녔나봐요.

    처음에는 스토킹이 제일 무서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스토커가 한참 저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반전이 있었고 영화같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수현

    수현 Lv.1

    04.06 · 211.♡.164.238

    비록 잊혀졌다 할지라도 아주 가끔씩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서 힘들때가 있죠ㅜ 근데 또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옅어지기도 합니다. 아기고양이님이 겪으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emo:moon-emo-005.gif}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수현 작성자

    04.06 · 223.♡.73.178

    피해자와 연대하는 조용한 시민들이 많다는 것을 직접 겪었으니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뭉클해요.

  • kita

    kita Lv.1

    04.06 · 125.♡.203.162

    미드 한 에피소드 본 느낌이네요.

    그나마 완전 고구마 엔딩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예전부터 행동력이 대단하셨군요.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kita 작성자

    04.06 · 223.♡.73.178

    그쵸? 영화나 미드 얘기같죠.

    저 정도면 괜찮은 엔딩이라 공유해봤습니다.

    행동력은 별 거 없습니다. 저도 다른 피해자들처럼 그냥 넘어가야하나 고민했는데 주변 분들이 호주는 이런 거 용납 못한다고 이것 저것 도와주셔서 잘 지나올 수 있었어요.

  • kita

    kita Lv.1 → 아기고양이

    04.06 · 125.♡.203.162

    행동력은 그 부분 말고 그런 외진데서 활동(?)하신 부분을 말씀드린거였습니다.

  • 아기고양이

    아기고양이 Lv.1 → kita 작성자

    04.06 · 223.♡.73.178

    외진 데서 캥거루, 여우, 토끼 사냥까지 다녔다고 하면 너무 무서우실까요… 친구 커플이 사냥을 즐겼어서 몇 번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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