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긴 뻘글 그리움에 관한... 낡은 내용

Lv.1 멜리 (49.♡.87.231)

2026년 4월 11일 AM 12:35

조회 950 공감 0

마흔이라는 문턱을 넘고, 이제 중반이라는 타이틀까지 달았지만

제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그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어요.

요즘 들어 왜 이리 유난히,

이름 하나가 지워지질 않는지…

스물셋의 저를 많이 흔들어놨던 그 친구.

저는 지금 누군가의 아내이고, 사춘기로 접어들려는 아이의 엄마인데

그럼에도 그 기억은 좀처럼 저를

비껴가지 못하네요.

첫 사람도 아니었고, 그 후로도 두어 번의

사람들이 더 머물다 갔지만

유독 잊히지 않는 건 왜일까요.

많이 좋아하긴 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땐 그런 단어조차 없었지만요.

둘 다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에서, 아르바이트 도중 만나

친구인 척, 아닌 척

그렇게 열심히 붙어 다녔던 사이.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도 모르는 동갑내기 그 친구.

하지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선명해요.

열심히 눌러대던 번호는 한 자리도 기억나지 않고,

싸이월드는 사라졌고, MSN 메신저도 없어졌고,

이메일 주소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

이제 남은 건, 그 아이 얼굴과 이름 하나뿐이네요.

다행스럽기도 하고, 마음 아프기도 하고요.

음악 취향, 글 쓰는 것, 영화 이야기까지

대화는 끊이질 않았고,

훌쩍 기차를 타고 광안대교를 보러 갔던 밤,

바다를 보며 마셨던 맥주 한 캔.

영화 〈이터널 선샤인〉,

그리고 스위트 피의 〈Kiss Kiss〉.

그 친구와 함께 간직했던 단어들이 참 많네요.

발신자 표시 007로 날아온 문자 한 통.

“보고 싶어요.”

그 다섯 글자가,

그 어떤 말보다 크게 심장을 울렸던 기억.

차로 한 시간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와 저를 찾아왔던 그 아이.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도 서로를 놓아주지 못하다 겨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할 그 아이가

문 닫히기 전, 제 열차 다른 칸에 올라타

모른 척 제 옆에 앉았던 순간.

필카로 늘 저를 담아주던 그 아이의 어느 날 낮은 읊조림.

“사람 눈을 카메라가 못 따라와.”

그리고 XY염색체에게 처음으로 들어본 말,

“너 진짜 멋있다.”

계획된 말도, 계획된 눈빛도 아니었어요.

자신의 감정도 모른 채

툭툭 튀어나오던 그 행동들이

2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만듭니다.

더 좋은 곳, 더 달콤한 말들로 채워주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독 남는 건

끝내 닿지 못하고,

감추려 해도 넘쳐흘렀던 그 마음이에요.

나이가 들고,

내 모습이 낯설어지는 계절을 지나며

자꾸 그때의 제가 그리워서일까요.

모든 사랑이 그렇듯

“그때 그러지 말걸” 하는

바보 같은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네요.

그냥, 우리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걸까요.

차라리 마음을 꼭 숨기고 친구로만 남았더라면,

오히려 더 오래 곁에 남았을까요.

천사 같은 남편과의 안정적인 결혼생활이

소중하고 복에 겨웠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순간, 불쑥불쑥 그때가 떠오릅니다.

조용하고 말갛고 수줍던 그 얼굴.

아마 그 친구도 누군가의 남편으로, 좋은 아빠로 살아가고 있을 테니…

지금은 더 근사해졌을 그 얼굴을 한 번쯤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큰 욕심이고 망상이겠지요.

다시 만날 수 없겠지만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때, 참 고마웠고

많이 사랑해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서툴고 불안했던 제가

많이 상처를 줬을 텐데

그게 미안하다고.

닿을 수 없지만

그 친구에게도 제가 좋은 기억이길.

사실은, 제가 차여서 못 잊는 거라는 건

안비밀. 🤫

요즘은

너드커넥션의 〈우린 노래가 될까〉만 듣고 있어요.

잠도 오지 않는 밤,

이런 생각만 자꾸 하게 되네요.

가진 건 많지 않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서로를 아꼈던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벅찼던 그 순간.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시절.

고마워,

초록 장갑 🤍

댓글 (21)

  • 벗님

    벗님 Lv.1

    04.11 · 61.♡.153.123

    아름답던 그 순간 순간들이

    우리를 우리의 모습으로 간직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그 나날들,

    아마 최선이었을 거에요.

    지난 나날들도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지금 이 순간들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을 테죠.

  • 멜리 Lv.1 → 벗님 작성자

    04.11 · 49.♡.87.231

    지금까지 꺼내볼 수 있도록 아름답게 기억할수 있게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 벗님의 댓글도 참 아름답네요
  • Java

    Java Lv.1

    04.11 · 116.♡.70.94

    아~
    왠지 남의 일기장을 훔쳐본 느낌이라서 댓글을 달기가 주저되었었네요.

    왜 이런 섬세하고 아련한 기억의 단편들은 전남친/전여친(현~~) 엔딩이 아닌걸까요?
    (사실 전남친 엔딩이었으면 상을 엎었을지도 모르죠 ㅋㅋ)
    아니,
    그렇기에 섬세하고 아련하고 알싸한 추억이 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멜리 Lv.1 → Java 작성자

    04.11 · 49.♡.87.231

    뇌가 미완성의 기억을 오래 간직한다고 하더라구요 각인된것 마냥 어딘가에 새겨져버린게 틀림 없습니다 너무 좋을때 갑자기 끊어져 버린 인연이라 유독 잊혀지질 않네요 그냥 막 여기에 풀어버리고 잊으려구요... 아무래도 그냥 나이들어가는 내가 서글퍼 그때의 반짝 거리던 저를 붙잡고 싶나봅니다 그에 눈에 비쳤던 제가 그립네요 ^^
  • 봇대스

    봇대스 Lv.1

    04.11 · 121.♡.90.120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아름다울 겁니다. 삶의 큰 부분입니다. 글 쓴 님의 마음이 참 곱네요. ^^

  • 멜리 Lv.1 → 봇대스 작성자

    04.11 · 49.♡.87.231

    불안형애착유형인 저를 많이 성장시켜준 아이에요 ㅎㅎ 회피형인 그 아이는 갑자기 뚝 하고 제 손을 놓았지만 그땐 참 슬펐는데 발신자제한으로 전화 와 한숨만 푹푹 쉬던 그 아이의 마지막 음성들이 많은걸 느끼게 해주더군요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 참으로 낭만적인 시대였어요 2005년에서 2006년은
  • 디와이디주주

    디와이디주주 Lv.1

    04.11 · 112.♡.49.74

    젊은 날의 아름더운 추억은 점점 희미해져 가지만 가끔씩은 미소짓게 만들기도, 가슴 저미게 만들기도 하지요.

    열정 가득한 사랑했던 날들의 기억은 각자만의 소중한 가슴속 앨범이지요.

  • 멜리 Lv.1 → 디와이디주주 작성자

    04.11 · 49.♡.87.231

    다들 그런 추억 하나쯤은 품고 사는거 맞죠?? ㅎㅎ 풍성하고 설레임 가득하게 해주었던 그 아이가 감사할 뿐입니다 그 시간에 놓여 한 없이 정성을 다해 사랑했던 그 순간이 어찌보면 복이죠 ..
  • Silvercreek

    Silvercreek Lv.1

    04.11 · 121.♡.214.196

    저도 첫사랑과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랑의 중간 어디쯤에 있었던 한 여인을 자주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때 그 사람을 사랑한 제가 인생 중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되묻곤 합니다.

  • 멜리 Lv.1 → Silvercreek 작성자

    04.11 · 49.♡.87.231

    맞아요 그 형태만으로 눈부시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서 그런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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