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과 아빠 생각
여름숲

Lv.1 여름숲 (58.♡.71.151)

2026년 4월 14일 PM 08:31

조회 1,756 공감 0

오늘 날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더군요.

점심 먹곤 가방하나 둘러메고 무작정 나서서 돌아다녔어요.

꽃이 좋은 곳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 계절 연두가 예쁜 곳으로요..

그러다 재래시장에 가서 시장을 한바퀴 도는데 봄나물들이 많아요.

아빠는 두릅을 참 좋아하셨는데... 어릴적 슬쩍 데쳐서 고추장 양념에 버무린 두릅을 드시는 아빠를 따라 먹으면 가시가 어린 입안을 긁습니다.

"아빠. 아빤 안따가워요? 가시 있어요"

"이건 그맛에 먹는거야, 입안을 막 걸고 들어가는 그 맛에.."

그땐 몰랐어요. 제철이 주는 거친 생명력을..

아빤 딱 환갑이 되시던 해 아프시기 시작해 4년 반을 아프시다 돌아가셨어요.

제가 정말 잘한게 있다면 제가 경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아빠 앞으로 고액의 암보험을 가입했두었던 거였어요.

당시 사회 초년생이던 제 월급으론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금액을 불입했었는데 가입후 불과 몇년 지나지않아 아프시는 바람에 치료에 큰 도움이 됐었어요. 벌써 15년도 넘었는데 그때 한달에 수천만원씩 하는 치료를 할 수 있었거든요.

두번째로 잘한게 있다면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낸거예요.

아빠는 내내 자영업을 하셔서 크면서 함께한 시간이 많고 저를 엄청 예뻐하셔서 어딜가든 제 손을 잡고 다녔었는데 제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대화를 많이 못했던거 같아요.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니까.. 성인이된 자녀와 얘기하는 법을 쉽게 터득하지 못하셨을까요?

아니면 노력해도 노력해도 수렁으로 빠져만 드는 삶의 무게에 눌려 자식에게 신경 쓰실 겨를이 없으셨을까요?

주중엔 엄마가 병원에 계셨지만 금요일 저녁이면 퇴근 후 제가 병원으로 가서 교대를 했어요. 그렇게 금토일.. 을 함께 보내며, 같이 자고 같이 먹고 무엇이든 함께.. 그때 아빠 손을 잡고 했던 산책은 아직도 가끔씩 떠올라요.

암병동의 산책이라고 해봐야 62, 63병동이 이어지는 긴 복도를 왕복하고 가끔 복도 끝의 창에 고개를 내밀고 밖을 보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게 다였어요. 그때 촌 산골 출신의 학생이 읍내 중고등학교를 걸어서 다니던 고단함, 더 공부를 하고 싶으셨지만 동리에 읍으로 고등학교 나온 친구가 한명도 없을 정도로 깡촌의 상황이 아빠를 대학으로 이끌지는 못했던 어릴적 아픔 얘기도 하시고, 입대하고 나서야 처음 경험해 본 도시의 생경함, 그 생경함이 동경이 되어 도시에 자리잡으며 평생을 하게되시는 고생.

그때 아빠는 어쩌면 싱싱했던 제철을 다 보내고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기에, 아직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까지 더해 당신의 인생 얘기를. 이제는 어른이 되어 당신의 병원비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자녀에게 회고하실 수 있으셨던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빠가 아프신 동안 자연치유를 해보시겠다고 강원도에서 잠시 사셨던 기간이 있었는데

오늘 시장에 나온 두릅을 보니 그해 이맘때 아빠가 산을 다니며 굵고 실한 원순만 꺾어서 한상자 가득 택배로 보내주신 따끔했던 두릅순이 떠올라 마음이 좀 센치해진거 같습니다.

술 한잔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댓글 (18)

  • 이루리라

    이루리라 Lv.1

    04.14 · 58.♡.94.201

    저도 아빠가 긴 투병을 하셨고 너무 이뻐했던 딸이기에 여름숲님 글을 읽으니 또 추억에 빠지게 됩니다.

    아빠를 너무 좋아하신 막내고모가 며칠 전 아빠 곁으로 가셨는데 그 곳에서는 언니 오빠 사랑 듬뿍 받으며 늘 행복하시라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ㅠㅠ 이 글 읽으니 또 부모님들 생각이 간절해져 저도 한 잔 해야겠어요.

    여름숲님 우리 건배해요^^

  • 여름숲

    여름숲 Lv.1 → 이루리라 작성자

    04.14 · 58.♡.71.151

    그래요 이제 우리 건배해요.

    읽던 책을 마져 끝내느라 한잔의 술을 잠시 미루며 안마실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책 말미 작가의 말에 아내가 악성종양 투병중이라며 기도를 해달라는 말을 붙여놓았네요.

    오늘은 그런 날인가봐요. 한잔 해야겠어요.

  • 세상여행

    세상여행 Lv.1

    04.14 · 61.♡.129.130

    수필 한 대목을 읽은 기분입니다.

  • 여름숲

    여름숲 Lv.1 → 세상여행 작성자

    04.14 · 58.♡.71.151

    제 작은 신변잡기이니 수필이기도 하지요

    뭐 거창할거 없잖아요.ㅎㅎ

  • latte4u

    latte4u Lv.1

    04.14 · 104.♡.90.36

    삶이란 참 모르겠어요.

    내가 이제 그때 아빠 나이가 되었는데,

    아빠도 나처럼 참 막막했겠구나 싶어요.

  • 여름숲

    여름숲 Lv.1 → latte4u 작성자

    04.14 · 58.♡.71.151

    그 막막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젊은 시절 그렇게 악착같이 일했나봐요.

  • 개같은냥이

    개같은냥이 Lv.1

    04.14 · 222.♡.64.78

    아빠보고싶어요…ㅠㅠ

    언제나 사진에서는 웃고만 있는 아빠…..

    지금 저한테 해주실 말 많을 것 같은데…

  • 여름숲

    여름숲 Lv.1 → 개같은냥이 작성자

    04.14 · 58.♡.71.151

    저도 그런생각 많이 해요.

    요즘 세상이 이렇게나 좋아졌는데 이 좋은 세상 좋은 음식 누려보지도 못하시고 뭐 ㅡ리 일찍 가셨나 싶어요.

  • 가시

    가시 Lv.1

    04.14 · 220.♡.96.209

    같이 말없이 한 잔 건네고 싶은 글이네요

    저희 아버지도 이맘때 두릅을 좋아하셨어요

    여름숲 님 아버님도 저희 아버지도 그곳에서 두릅 잘 즐기고 계시리라 믿고 싶습니다

  • 여름숲

    여름숲 Lv.1 → 가시 작성자

    04.14 · 58.♡.71.151

    이맘때 두릅은 꺾어 데쳐 고추장에 푹찍어 먹고 무쳐서도 먹고

    철이지나 움두릅이 나오면 두릅전을 부쳐먹고

    나물하나에도 엄마아빠와 함께한 추억이 잔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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