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교수님 세종학당재단 이사장 취임사
게으른고양이

Lv.1 게으른고양이 (203.♡.235.186)

2026년 4월 15일 PM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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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공에 나오시는 전우용 교수님의 세종학당재단 이사장 취임사인데 글이 너무 좋아서 퍼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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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간송미술관 소장품 전시회에 갔다가 『훈민정음 해례본』 앞에서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망신스러우니 빨리 그치라”고 타박했지만, 눈물은 좀체 멎지 않았습니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고 머리가 나중에 해석하는 일도 있습니다. 저는 평생 역사를 공부하면서 ‘현대의 한국’을 만든 힘의 원천이 한글에 있다고 생각해 왔으니,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글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본 듯한 감동을 느낀 건 당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후, 인류는 이제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과 결별하지 않으면 자멸(自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쟁 없는 세계를 만들려면 국가간 평등을 실현해야 했으며, 그 전제는 ‘인류평등’이었습니다. UN이 창설되고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으며, ‘구(舊) 식민지 질서 타파’, 즉 ‘탈(脫)식민’이 인류사적 과제로 부상했습니다. 물론 이 과제는 양면적이었습니다. 식민지를 지배했던 나라 국민들에게는 제국주의와 패권주의, 자민족 우월주의를 청산/극복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고, 식민지였던 지역 주민들에게는 종속적 사회·경제구조 타파, 빈곤과 자민족 열등의식 극복이 핵심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이 과제를 수행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되었어도 구(舊) 식민모국의 언어와 문자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구(舊) 식민지 주민 다수는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표현하고 자기 문자로 기록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 식민지 체제’가 해체된 지 80년이 넘었지만, 식민지였던 나라 대다수는 아직도 독재와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였다가 이른바 ‘선진국 그룹’에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한글은 식민지하 한국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고, 해방 후 민족문화 재건과 국민통합, 경제성장을 촉진한 지렛대였습니다. 한글은 작업장 내의 효율적인 의사 소통과 국민들 사이의 사회적 토론을 쉽고 빠르게 매개했습니다.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기에 편안케 할 따름’이라던 세종대왕의 뜻은 한국전쟁 이후 신분의식 소멸과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전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한글을 매개로 빠르게 형성된 ‘집단지성’은 식민지배의 유산인 독재와 빈곤을 극복하는 데에 놀라운 힘을 발휘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한국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은 ‘탈식민’의 인류사적 과제를 선두에서 수행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문화는 제국주의적 오만함도, 식민지적 비굴함도 없는 지점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소구력을 갖는 이유 중 하나도, 미국 국적의 슈퍼맨이나 아이언맨이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코드가 없는 데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7년 「나의 소원」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며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썼습니다. ‘탈식민의 세계’를 향한 꿈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인들도 ‘탈식민의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숱한 미숙성을 드러냈고, 시행착오들을 범했습니다. 한국인들은 민주국가/선진국가로의 ‘이행’을 ‘민족적 과제’로 삼으면서 ‘모범 국가’들을 상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국인들은 자기 나름의 ‘발전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식민주의의 부정적 유산을 다 청산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인들은 독재체제를 타도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민주정’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군사력과 경제규모면에서도 ‘열강(列强)’의 지위에 올라섰습니다. 이제 한국은 식민지를 겪은 많은 나라 국민들에게 미국이나 유럽국가, 일본과는 다른 ‘탈식민 근대화’의 모범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인들에게는 ‘탈식민’의 경험을 전 인류와 공유할 책임이 부과된 셈입니다.

최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의 반성적 사유에 기초한 현대 문명이 급속히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평등과 주권평등의 원칙이 무너지고, ‘힘이 지배하는 세계’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전 인류의 꿈이었던 ‘평화로운 지구’, ‘탈식민의 세계’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인들이 가꾸고 다듬어 온 ‘탈식민의 가치’를 세계인들과 공유하는 일은 더욱 절실합니다. 이제 우리 세종학당재단의 책무는 더욱 막중해졌습니다. 우리가 세계인에게 보급해야 하는 것은 ‘언어’만이 아닙니다. 우리 말과 우리 문화에는 세계평화와 인류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탈식민의 가치’가 녹아 있습니다. 세종학당재단은 세계인과 함께 이 가치를 수호하는 보루가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세종학당재단을 지켜오신 여러분께 경의를 표하며, 제 모든 열과 성을 다하여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25)

  • 클라시커 Lv.1

    04.15 · 211.♡.181.157

    아 진짜 정말 명문입니다.

  • 게으른고양이

    게으른고양이 Lv.1 → 클라시커 작성자

    04.15 · 203.♡.235.186

    네.. 페이스북 보다가 너무 좋아서 혼자보기 아까워 퍼왔습니다.^^

  • 클라시커 Lv.1 → 게으른고양이

    04.15 · 211.♡.181.157

    저는 맺음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종학당재단은 세계인과 함께 이 가치를 수호하는 보루가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세종학당재단을 지켜오신 여러분께 경의를 표하며, 제 모든 열과 성을 다하여 지원하겠습니다.”

    저런 기관장이 대부분 낙하산이 가는 자리라, 이런 마인드 가지기는 커녕 꺼드럭거리기나 하더라구요.

  • 베이수맨 Lv.1

    04.15 · 218.♡.151.235

    "오늘날의 한국 문화는 제국주의적 오만함도, 식민지적 비굴함도 없는 지점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소구력을 갖는 이유 중 하나도, 미국 국적의 슈퍼맨이나 아이언맨이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제국주의적 코드가 없는 데에 있습니다."

    전체를 찬찬히 읽었는데, 이 부분에서 이마를 탁 치게 만드시는군요.

  • 게으른고양이

    게으른고양이 Lv.1 → 베이수맨 작성자

    04.15 · 203.♡.235.186

    저는 이 문장이 너무 좋더라구요..
    "한국인들은 민주국가/선진국가로의 ‘이행’을 ‘민족적 과제’로 삼으면서 ‘모범 국가’들을 상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국인들은 자기 나름의 ‘발전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 보수주의자

    보수주의자 Lv.1

    04.15 · 218.♡.42.109

    시대를 직시하는 역사학자의 통찰이란 무엇인지 잘 알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 아는오빠야

    아는오빠야 Lv.1

    04.15 · 220.♡.38.60

    우아!! 전우용 교수님 영전을 축하드립니다. ^^

  • 불태워버려

    불태워버려 Lv.1

    04.15 · 112.♡.221.58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느껴지는 바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 디즈니랜드

    디즈니랜드 Lv.1

    04.15 · 112.♡.252.254

    생존을 넘어서 공존의 길을 선도하는 대한민국만세입니다.

  • B

    buchanan Lv.1

    04.15 · 59.♡.191.119

    이 글을 읽는데, 왜 눈에서 침이 흐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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