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 (175.♡.147.253)
2026년 4월 20일 PM 10:05
흔히 진화를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하는데, 인류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그 공식이 좀 달라진다. 강한 것보다 눈치 빠른 게 살아남았고, 눈치보다 중요한 건 인간 입맛에 안 맞는 것이었다.
늑대가 딱 그 케이스다. 원래 늑대는 육식의 자존심이었는데, 어느 날 한 무리가 깨달은 거다. 인간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면 사냥 안 해도 뼈다귀가 나온다는 걸. 그렇게 육식 동물의 근엄함을 반납하고 잡식성 하이브리드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했다. 결과는 인간의 서열 문화를 통째로 받아들인 '개' 라는 직위 획득. 리더만 잘 만나면 멸종 위기종에서 지구 정복 파트너로 떡상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반면 큰바다오리는 정반대 케이스다. 사실 펭귄의 원조는 남극이 아니라 북대서양의 큰바다오리인데, 남극 펭귄은 나중에 걔네 이름을 그냥 가져다 쓴 거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음. 이 새는 인간을 보면 반갑다고 다가왔고, 몸엔 기름이 가득했고, 고기 맛도 훌륭했다. 나무가 귀한 무인도에서 선원들이 이 새를 살아있는 채로 불 속에 던졌는데, 몸에 기름이 많아서 불이 잘 붙었기 때문이다. (실화임) 고기도 뜯기고, 기름으로 불쏘시개가 되고, 멸종당한 뒤엔 이름까지 남극 펭귄한테 넘어갔다. "인간 친화적인데 맛까지 있다" 는 건, 가축이라는 보호구역에 못 들어갈 경우 멸종 하이패스다. 이름도 같이 반납하게 된다.
아메리카 말도 타이밍 미스로 망한 케이스다. 원래 말의 고향은 아메리카인데, 베링 해협을 건너온 인류가 이들을 탈것이 아니라 스테이크로 인식해버렸다. 당시 아메리카 말들은 인간을 처음 봐서 도망갈 줄을 몰랐다. 결국 인류는 말이 문명의 엔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싹 다 파먹어버렸고, 덕분에 후손 인디언들은 1만 년 동안 도보 배달을 해야 했다. 미래 가치를 못 본 조상들의 식탐이 후손에게 그대로 청구된 셈이다.
호주 딩고는 가출에 실패한 개다. 가축화가 완료된 개였다가 야생으로 튀어서 5천 년간 늑대 코스프레를 하며 나름 야성을 쌓았는데, 최근 동네 들개들과 교배되면서 수천 년 쌓은 야성이 단 한 세대 만에 '개' 로 리셋되는 중이다. 한 번 새겨진 가축화 유전자는 질기다. 딩고 뇌 회로 밑바닥엔 여전히 "대장님이 긁어주던 등"에 대한 백업 데이터가 남아있는 거다.
그리고 이 모든 케이스의 끝판왕은 실러캔스다. 4억 년 동안 멸종 안 당한 비결이 뭐냐면, 인간이 먹어보고 "우웩, 고무 씹는 맛이야"라고 소문을 낸 것이다. 아미노산 구조 자체가 인간 소화 기관이랑 안 맞게 되어있어서, 맛집 리스트에서 영구 제명된 덕분에 심해에서 4억 년째 평화 유지 중이다.
근데 이 모든 공식을 비웃는 케이스가 하나 있다. 고양이다. 사람들이 흔히 개처럼 큰 고양이과 동물이 가축화된 거라 생각하는데, 고양이 조상은 북아프리카 리비아고양이 - 지금 집고양이랑 생김새가 거의 똑같다. 복종한 것도 아니고, 진화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농사를 짓자 쥐가 꼬였고, 쥐를 따라 고양이가 왔고, 그냥 눌러앉았다. 인간이 가축화한 게 아니라 고양이가 인간을 선택한 거다. 지금도 주종관계는 불명확하다.
결국 인류 등장 이후의 생존 공식은 이렇다. 서열에 복종하거나, 맛없게 진화하거나. 친절한데 맛있으면 그냥 땔감이다. 단 고양이는 예외다. 걔넨 그냥 처음부터 룰이 달랐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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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비령
04.20 · 140.♡.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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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3YNM4N
→ 은비령 작성자
04.20 · 175.♡.147.253
가축화 5가지에서 못들어서죠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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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균쇠에서 얼룩말도 가축화 실패한 이유가 지랄맞은 성격과 맛대가리 없는 고기 때문이라고 봤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