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선택해서 사는 민족
Enlight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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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4일 AM 07:31 · 수정됨(05. 1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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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J가 만나고 싶다고 마침내 연락을 했습니다.

J는 미국에서 제 수업을 여러 차례 들으면서 저를 많이 따랐던 학생으로, 워낙 충직하고 똘똘한 친구여서 제가 특히 예뻐하던 학생이었습니다. 한국인 엄마 백인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트와이스와 블랙핑크의 노래에 빠져 들기 전에는 한국어도 전혀 할 줄 몰랐고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전혀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2010년대 불기 시작한 미국 내 K 문화 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처음 생겨 대학에 들어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동아시아 전통문화에도 관심을 두어 제 수업도 몇 개 들으면서 한국과 동아시아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한 평범한 미국인 청년입니다.

4년 대학 생활 중 3학년이 되던 해 한국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제대로 배워 보겠노라고 연세대로 교환학생을 와 일 년을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가지도 않은 채 일 년 반 이상을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한국에 체류하면서 자기의 절반 한국인 정체성을 되찾아 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도 마침 안식년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으니 한번 보자고 해 놓고도 정작 한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좀처럼 녀석에게 연락이 오질 않았기 때문에 저는 마냥 기다렸습니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J가 저에게 꺼낸 말은 너무나 예상 외로 "한국에 온 걸 후회한다"였습니다. J의 또박또박 한국말 단어 하나 하나가 가슴에 박혔습니다.

왜? 

한국인들은 자기가 만난 민족들 중 가장 똑똑하면서도 가장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J는 한국인들을 이해하기 너무 어렵고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온전한 한국인이 되려고 했던 걸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왜 결혼을 안 하고 출산율이 그렇게 낮고 자살률은 그렇게 높은지 왜 road rage가 많고 다들 이민 가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다며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 같은 욕망을 자기 것으로 추구하고 살면서 끊임없이 남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는 게 한심하다고 했습니다.

남의 꿈을 자기 꿈으로 알고 그걸 추구하고 사느라 다들 너무 지치고 항상 짜증과 화가 나 있는 것 같다며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남에게 겉으로 보여지는 것들에 집착하고 그걸로 남들을 이겨야 한다 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너무 물질주의적이고 허세와 과시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개개인들의 다름과 개성을 제대로 존중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그렇게 좋아하던 J가 어쩌다가 이렇게 혐한이 되었나, 혹시 일본/중국 친구라도 사귀었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니? 

한국에 체류한 2년 반의 시간동안 두 세 명 여자도 만나고 그 중에는 진짜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친구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조건이라는 말을 여친 사귀면서 배웠다고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만 사랑해서 결혼하기에 한국의 문화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고 지나치게 요구하는데 처음에는 장난인줄 알았다가 나중에는 상처를 너무 받아 더이상 그 친구를 볼 자신이 없어졌답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초라한 사람인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또 강남의 어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 하면서 생활비도 벌고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보았답니다. 아무리 일을 하고 싶어도 혼혈이라 어학원에서 채용도 안 되어서 포기했다가 운 좋게 급하게 원어민을 구하는 강남의 어학원에 채용이 되었는데 한국인처럼 생긴 자기 혼혈 외모 때문에 자기 반에는 백인 선생 수업에 비해 수강생이 절반도 안되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백인 강사들에 비해 학생수가 제일 적은 것은 언제나 큰 스트레스. 다 알만한 큰 어학원인데도 미국에서는 딱 고소감인 팀장의 폭언과 직장 내 갑질을 당하는 것은 일상. 비자 스폰서 취소를 무기로 임금을 밀리기도 하고 제 때 주지도 않는 일도 있었다고 해서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 살다보니 자신도 무기력해지고 늘 짜증과 화가 나 있는 상태더랍니다. 미국에서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이렇게 우울하고 자신감 없이 살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못한 것은 정말 빨리 보고 싶었지만 어학원 일로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초라해진 자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서라고 할 때 그냥 이 친구를 한번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있던 2년 반의 시간동안 마음 터 놓고 지낼 친구 하나 없이 이제 막 21-2살 먹은 어린 학생이 기댈 곳 하나 없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참 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이제 일도 다 정리하고 이번 여름에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나를 좀 더 일찍 만났으면 내가 좋은 사람들을 소개해줄 수 있었을 것인데, 

한국이 헬 같아 보여도 여기에도 아직 희망이 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이런 변명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이 친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위한 것이라는 자각 때문에 그만 두었습니다. 

J를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

너무 많은 생각이 몰려와 이어팟 볼륨으로 뇌를 마비시키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습니다. 


ps: 저희 학교만의 사례는 아니고 미국 내 꽤 여러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실행하는 study abroad (교환학생) 프로그램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 중 만족도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가 놀랍게도 바로 한국입니다.  


ps: 지금 미국의 한국학 1세대로 한국학 분야를 개척한 교수들이 70-80년대 한국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소박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어서 한국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불과 40-50년 사이에 한국이 왜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겠습니다. 

댓글 (83)

  • Picards

    Picards Lv.1

    24.05.14 · 218.♡.201.9

    외부인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보지 않아도, 우리도 이미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죠.
    아무도 고치고 싶어하지 않을뿐...
    아니 고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긴 하네요. 다만 기득권층이 워낙 강고하게 만들어놓은 시스템에서 아무도 내가 먼저 피해를 보더라도 탈출하고 깨고싶어하지 않을 뿐이죠. 비겁한겁니다.
    저부터도 그렇고요.
    스스로 국가적 자살을 선택한 최초의 국가가 될겁니다.
  • 윤사모

    윤사모 Lv.1

    24.05.14 · 124.♡.160.8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 같은 욕망을 자기 것으로 추구하고 살면서 끊임없이 남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춘다... 뼈때리네요.
    근데... 본인도 백인강사와 수강생 숫자 비교하며 스트레스 받았으니... 하프 코리안이 맞네요.
  • Enlightened

    Enlightened Lv.1 → 윤사모 작성자

    24.05.14 · 118.♡.144.30

    강사 자신은 수강생이 적으면 힘이 덜 드니 좋았겠지만 매니저들에게는 수강생 적은 게 좋지 않았겠지요. 계속 수강생 압박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 윤사모

    윤사모 Lv.1 → Enlightened

    24.05.14 · 124.♡.160.8

    제 짐작이지만... J의 한국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실연이라는 상실감때문에 과도하게 증폭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외부인의 냉정한 객관적 판단으로만은 볼 수 없다는 거죠. 지적한 포인트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만의 문제일까요? 배우자감을 고를 때 경제적 조건을 따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우리나라가 유난히 더 심한가에 대한 평가를 할 데이타를 갖고 있지 않지만... 결혼중매업하는 지인 덕분에 접해본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 여성들에 비해 훨씬 경제적 조건에 예민했고 물질적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더군요. 너무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요. 그렇다고 저는 베트남 여성이나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속성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 Enlightened

    Enlightened Lv.1 → 윤사모 작성자

    24.05.14 · 118.♡.144.30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가 다 겪고 있는 문제이고 어쩌면 우리는 비엣남에 비교해보면 덜 겪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살율과 행복지수, 출산율 등의 비교 가능한 국제적 지표에서 한국의 불행은 객관적으로 확인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스웨덴도 덴마크도 자본주의 국가이지만 그들은 이렇게 불행하지 않습니다.
  • swift

    swift Lv.1 → 윤사모

    24.05.14 · 59.♡.216.65

    저도 이 생각을 했네요.
    물론, 근본적인 내용은 동의하고, 맞는 말이긴하합니다.
    다만,
    J의 태도에서 "실망"을 넘어서 "분노"까지 느껴지는 건 아마도 본인의 감정상태가 개입되어서이겠지요.

    어디까지나 예상이긴 합니다만,
    그 분노의 원인은 가진게 없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차였다는 본인에 대한 실망이 클 겁니다.
    사실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은게,
    가진게 없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차여본 사람은 다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ㅠㅠ
    내가 모자란게 아니라 이 사회가 잘못된 거라는 도피처? 를 찾게 되는 게 자기보호의 본능이거든요.

    그 와중에 사실 가진 거 없는 백인이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과 불편함이 없는게
    한국과 일본인데,
    본인은 완전히 백인은 또 아니고....
    한국인의 유전자가 섞여서 본인이 더 힘들다는 사실이 한국에 대한 증오까지 생기게된 원인이 됐을 것 같네요.

    사실 먹고 살기 힘든 건 세상 어디나 다 똑같다고 봅니다.
    다만, 힘든 이유가 다를 뿐이죠.

    우리나라는 비교과 경쟁,
    미국은 마약과 총,
    유럽은 인종/문화 문제와 테러,
    등등 말이죠.

    본인의 캐릭터와 성격에 따라 어느 문화에선 잘 맞고, 어디에선 안맞는게 있을 겁니다.
    본인에게 안맞는다고 해서 어느나라는 잘못됐고, 어느라나는 안좋고 그렇게 보는건 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 Bcoder™

    Bcoder™ Lv.1

    24.05.14 · 211.♡.254.21

    타인이 지옥인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지요.
  • 아이시스 Lv.1

    24.05.14 · 122.♡.210.197

    좋은점은 없었다고 하던가요??
    나쁜점만 나열하면 어디든 마찬가지 아날까요...미국도 뭐 따지고 보면.....
  • Enlightened

    Enlightened Lv.1 → 아이시스 작성자

    24.05.14 · 118.♡.144.30

    이미 마음이 많이 다친 상태라 좋은 점을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곳에 살아도 다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이 있겠고 완벽한 곳이란 없겠지만 그게 우리 스스로의 문제점들에 눈 감고 용인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을 잃지 않되 다른 사람들의 지적에 마음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는 곳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면요.
  • MoonKnight

    MoonKnight Lv.1

    24.05.14 · 211.♡.144.214

    "한국인들이 너무 물질주의적이고 허세와 과시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개개인들의 다름과 개성을 제대로 존중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미국인이 할 얘기는 아닌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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