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V4030 (210.♡.27.130)
2026년 4월 30일 AM 10:37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에는 상해사변도 일으켜서 중국을 향한 노골적인 침략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상해사변의 경우 중국군 수는 만주사변보다 적었지만 중국군이 강력하게 저항했고, 일본군 사상자도 수천이 나온 상황이었죠. 그래서 일제는 이겼다는 것을 더욱 자랑하여 중국의 사기를 꺾고자 하였고,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전승기념행사를 크게 갖고자 하였습니다.

<상해에서 방어하는 중국군>
이를 위해 일제는 일본군 1만명 일본인 1만명, 그 외 각국 사절을 불렀고, 대대적인 행사가 열리게 되었죠. 행사가 시작되고 11시에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11시 50분 기미가요가 울려퍼진 다음, 본 행사가 시작될 시점, 갑자기 물통 같은 게 날아오더니 단상에 명중하였고 그대로 폭발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이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은 왼다리 절단 중상, 주 중국공사 시게마쓰 마모루는 오른다리 절단 중상을 입었습니다.
<홍커우 공원 의거 직후>
<당시 의거 영상>
이 의거를 행한 이가 바로 윤봉길 의사이십니다. 원래 윤봉길 의사는 농촌계몽을 꿈꾸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3.1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여 학교를 자퇴한 후 한학을 익히고 농촌 부흥을 위해 독서모임과 교과서를 만들고, 연극공연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셨죠. 그러나 1930년부터 일제의 광기가 점점 기세를 부리게 되자, 만주로 망명하려다 옥고를 치르게 되고 30년 12월에 중국으로 건너가 1932년 8월 상해로 활동무대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를 드러내죠.
1932년 이봉창 의사가 동경에서 일본왕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상황... 일제는 대공황 이후 자신들이 겪는 상황을 돌파한답시고, 앞서 살펴본대로 상해사변까지 일으켰죠. 이에 김구 선생은 이 행사장을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윤봉길 의사가 이 일에 자원하지요. 이렇게 홍커우 공원 의거가 이뤄지게 된 거죠.

<의거 전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사진>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상해침략 총사령관을 폭사시킨 것만으로도 엄청난 전과였는데, 그 외에도 중상을 입힌 사람이 결코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일례로 시게마쓰 마모루는 후에 의족을 차고 쩔뚝거리며 전함 미주리에서 맥아더에게 항복문서를 바친 자죠. 그래서, 일제는 윤봉길 의사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뒤 총살형을 내리고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는 길에 암매장하였습니다. 그만큼 일제에게 충격이었던 거죠.
<미주리에서의 일제 항복문서 조인식인데요, 여기서 쩔뚝거리며 등장하는 게 시게마쓰 마모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행동이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1932년 당시, 임시정부는 사실상 뭘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임정 내부의 갈등은 둘째치고, 서구 열강들은 일제를 견제하지만 일제의 침략을 수수방관하였습니다. 당시 국제연맹은 미국이 그 안에 없었으니 막을 사람도 없었죠. 독립군도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와해되었구요. 중국인들도 만보산 사건 등으로 한국인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중국인들도 상해사변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도와주는 나라도 없었구요.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를 통해, 한국인의 진심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거였죠. 물론 장제스는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그렇게 감격하지는 않았습니다.하지만, 장제스도 민심을 알고 있었고, 김구 선생과의 친분으로 이후 임시정부를 많이 도와줍니다. 김구 선생과 임정 인사들이 일제의 중국 침공으로 피난다닐 때 많은 중국 사람들이 도와줬는데 이 윤봉길 의사의 의거 덕이었던거죠. 그리고, 중일전쟁 이후 김원봉 선생의 의열단과 합작하고 광복군이 출범하는 계기가 됩니다.

<한국 광복군 사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한국 광복군 창설에도 도움이 됩니다>
1945년 광복이 이뤄지고, 김구선생은 사람들을 시켜 일본에 암매장된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그리고 예산으로 내려가 윤봉길 의사의 모친을 방문하여 의거 직전 윤봉길 의사와 교환한 시계를 드리려고, "의사의 의거때문에 광복이 앞당겨질 수 있었다고" 말씀드렸지만 모친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네요. 여기서 모친의 슬픔을 느끼곤 탄식하고 그대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예산 윤봉길 의사 고택을 방문한 임시정부 요인과 유족(1946. 4. 26). 해방 후 처음 맞는 윤 의사 의거 14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임정 요인들은 윤 의사 고향인 예산을 방문하여 유족을 위로하였다. 앞줄 왼쪽부터 조성환 임정 군무부장, 김구, 부친 윤황, 모친 김원상, 부인 배용순, 아들 윤종. 뒷줄 백부 윤경, 종형 윤순의, 셋째 동생 윤남의, 둘째 동생 윤성의, 넷째 동생 윤영의. 장남 윤종은 윤 의사가 청도에서 찍은 양복 차림의 사진을 들고있다.]](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8/08/28/20180828183902303315.jpg)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방문한 김구선생>
이렇게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합니다. 제 짧은 글이 이 사건과 그 의미를 다 담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대한민국은 수많은 이들의 피와 눈물로 이뤄진 나라이며 이 나라를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과 같은 강도 떼들에게 넘길 수는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4월에는 너무나 많은 슬픔과 희생이 배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 슬픔와 희생 위에 서있고 무엇을 해야할 지 선택을 잘 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봉길 의사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p.s.1. 아기고양이님이 지명하여 글 써달라고 하셨으니 부족하지만 써봅니다.
p.s.2. 하루 늦게 글이 작성된 것은 제가 어제 비염약 먹고 뻗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건강 유의하시길.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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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va
04.30 · 116.♡.7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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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V4030
→ Java 작성자
04.30 · 210.♡.27.130
부족한 글이지만 일단 썼습니다. 나머지는 잘 아시는 분이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ㅠㅠ
- 강
강형진
04.30 · 122.♡.146.139
저도 윤의사의 의거를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이 의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카이로 회담에스 우리나라의 독립명시는 정말 엄청난 전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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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V4030
→ 강형진 작성자
04.30 · 210.♡.27.130
네 맞습니다. 윤의사의 의거가 있었기에 한국인의 저항과 독립의사가 확실하다는 게 인식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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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나글
04.30 · 125.♡.112.6
어제 어느 한집에 태극기가 왜 걸려있지 했는데, 기억하시는 집이였나 봅니다..
덕분에 기억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
FFV4030
→ 하나글 작성자
04.30 · 210.♡.27.130

@아이고양이 님이 축하메시지 올리시고 저보고 글을 써줄 걸 요청하신 거라..
저도 글을 쓰며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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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화권이탈
04.30 · 223.♡.227.140
윤봉길 의사가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한 명 한명의 용기와 절박함이 오늘을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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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V4030
→ 통화권이탈 작성자
04.30 · 106.♡.79.133
네 맞는 말씀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윤봉길 의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용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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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기고양이
04.30 · 223.♡.55.135
역시 FV4030님이세요. 👍
정성스런 글 감사합니다.
참, 저희 엄마는 비염에 좋다고 작두콩차 꾸준히 드셔서 좋아지셨는데 혹시 안 해보셨음 드셔보시면 좋겠어요.
예전에 고약상자님이 비염에 퀘르세틴을 권해주셨는데 안 드셔보셨다면 이것도 드셔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빠는 작두콩차로 효과를 못 보시고 엄마보다 비염이 더 심했는데 퀘르세틴 드시고는 조금 나아진 것 같다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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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V4030
→ 아기고양이 작성자
04.30 · 210.♡.27.130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ㅠㅠ
댓글을 작성하려면 이 필요합니다.
글 고맙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업적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