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 대화의 중요성에 대한 글
l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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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4일 PM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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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고전이 된 과학 에세이 '부분과 전체'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청소년기부터 양자역학의 완숙기까지의 40여년 간의 과학적 여정에 주요한 대목마다에 대한 내용으로, 과학계뿐 아니라 인문학적으로도 일독의 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이 책의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책을 통해 과학이 대화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이 정립되는 과정 중에 수많은 천재 물리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론을 가지고 그들만의 논리를 세워나가고, 자신들의 방법론과 논리를 가지고 서로간의 논쟁과 방어를 통해 양자역학의 뼈대가 만들어지고 살이 붙어가면서 전체적인 상을 수립해 나갑니다.

이 과정 중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구절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합니다.





 나는 디랙의 이야기를 들으며 디랙에게 물리학 연구란 등반가들이 어려운 바위산을 오르는 것과 같겠구나하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즉 언제나 다음 3미터를 더 오르는 것만이 중요하고, 그렇게 한 구간 한 구간 전진하다보면 봉우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의 등반 루트와 그에 다른 어려움들을 상상하는 것은 기운만 빠지게 할 뿐, 쓸데없는 일이며, 그 밖에도 진정한 문제는 어려운 지점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이런 비유를 고수하자면, 나는 전체의 등반 코스가 결정되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타입이었다. 올바른 코스를 찾은 다음에야 비로소 개별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기에 바위산 비유의 오류는 바위산이 정말 오를 수 있는 산인지 결코 확실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자연 속의 연관이 결국은 단순하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자연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 능력이 자연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전에 슈타른베르크 호숫가를 걸을 때 로베르트가 했던 말에 근거했다. 그때 로베르트는 자연을 이 모든 형태로 조성한,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우리의 정신 구조, 즉 사고 능력의 구조 또한 만들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폴과 나는 이런 방법적 질문에 대해, 앞으로의 과학의 전개와 관련한 희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견해 차이를 약간 핵심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폴은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 있어"라고 말했고 나는 정확히 반대로 "한 번에 한 가지 어려움만을 해결할 수는 없어.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폴의 말은 자신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한꺼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은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였을 것이다. 원자물리학처럼 일상적인 경험을 한참 벗어나는 영역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를 생생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내 말은 한 가지 어려움을 진정하게 해결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을 만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단순하고 커다란 연관에 다다르면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어려움들까지 없어진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폴의 발언과 나의 발언 모두 상당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닐스 보어가 곧잘 하는 말을 떠올리면서 둘 사이의 모순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닐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잘못된 주장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다시금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기존의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의 눈에 보이는 현상과 미적분이라는 체계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되는 분야와 달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중성, 상보성, 관찰 자체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불확정성까지 그간의 고정관념으로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현상을 지켜보면서 과학자들 자신도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유연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죠.

그러한 수수께끼에 한발한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위 글의 마지막 단락처럼 두개의 정반대처럼 보이는 방법론과 논리가 부딪힐 때,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의 접근법이 아닌, 나도 옳고 너도 옳은 것 아니냐? 그럼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거냐? 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정반합의 과정을 수천, 수만번을 거치면서 한발한발 진리에 접근해가는 역사적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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