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가 없던 시절
큐리스

Lv.1 큐리스 (115.♡.31.45)

2026년 6월 10일 AM 10:46

조회 1,822 공감 0

독백같은 글이라서 반말로 쓴점 양해부탁드려요~~ 제글 인용입니다~~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낯선 도시, 접어도 다시 펼쳐지지 않는 종이 지도, 조수석 사람의 손가락. 그래도 어떻게든 도착했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봤다.

길을 잃으면 내려서 물었다.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며 그 동네 냄새를 맡았다. 빵집 굴뚝 연기, 비 온 뒤 아스팔트, 누군가의 저녁밥.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남았다.

처음 간 길은 낯설었다. 두 번째 가면 조금 익숙했다. 세 번째가 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 저 골목 안쪽에 빵집이 있구나, 여기서 좌회전하면 지름길이구나, 비 오는 날은 이 구간이 막히는구나.

길은 여러 번 가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틀려도 괜찮았다. 아니, 틀리는 것 자체가 여행이었다. 잘못 들어선 골목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고, 돌아가는 길에서 더 좋은 길을 발견했다. 실수가 지도가 됐다.

우리는 더 자주 주변을 봤다. 더 자주 질문했다. 더 자주 틀렸다. 그래서 더 많이 기억했다.

지금은 처음 가는 길도 막힘이 없다.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핸들을 돌리면 된다. 도착한다. 정확하게, 빠르게.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음에 또 가도 다시 네비를 켠다. 같은 길을, 처음 가는 것처럼.

관찰이 사라졌다. 반복이 사라졌다. 한번 갔던 길을 다시 보고, 느끼고, 다시 또 깨닫는 그 과정이 사라졌다. 오로지 속도와 표시판만 보고 달린다.

네비게이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그렇게 소비한다. 빠르게, 정확하게, 한 번만. 과정 없이 결과만. 느낌 없이 정보만.

네비게이션은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그때는 목적지 이전의 모든 것이 다 이야기였다. 지금은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목적지에는 도착했는데, 어딘가에는 도착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어딘가가 뭔지는, 한번 길을 잃어봐야 안다.

댓글 (5)

  • 박스엔

    박스엔 Lv.1

    06.10 · 210.♡.46.70

    독백이라도 반말이면 규정에 걸립니다. 수정 하지 않으시면 삭제 되실 수 있어요.

  • 삶은다모앙

    삶은다모앙 Lv.1 → 박스엔

    06.10 · 223.♡.81.69

    그림으로 붙이면 문제 없을까요

  • 큐리스

    큐리스 Lv.1 → 삶은다모앙 작성자

    06.10 · 115.♡.31.45

    ㅎㅎ 재밌는 생각이네요 다음번에는 해볼께요..

  • whocares

    whocares Lv.1

    06.10 · 58.♡.171.77

    쓰신 내용은 매우 공감이 됩니다. 이동하는 과정 자체의 물질성이 사라졌죠.

    경어체 사용 문제는, 따옴표를 쓰시고 셀프 인용이라고 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 호키포키

    호키포키 Lv.1

    06.10 · 203.♡.108.75

    공감이 되네요. 내비가 시키는 대로 가면 편하지만 그만큼 덜 쌓이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저는 여행을 가면 최대한 많이 걷습니다. 걸으면서 풍경을 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아요. 그런 게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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