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맨 (175.♡.155.138)
2024년 5월 21일 AM 11:00 · 수정됨(16:32)
한국에서는 이문열이 삼국지를 다시쓰면서 조조중심으로 썼고 중국에서도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90년대부터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기는 없습니다.
서주지사 도겸이 조조 아버지를 비롯한 조조 일가 친족들을 다 죽였죠
여기에 조조가 분노해서 서주지사 도겸 or 도겸 9족을 죽인게 아니라
그냥 서주(지금의 산둥반도와 일대 ) 름 침공해서 살아있는 모든것을 다 죽였습니다.
이때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중국 기록에만 2차례 침공에서 15~20만명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나옵니다. 조조가 그렇게나 죽이고 싶은 도겸은 조조가 죽이지 못했습니다.
조조는 죽을때까지도 서주학살에 대해서 반성이나 후회 1g도 없었습니다.
중국 사학계에서도 조조가 중국통일을 하는데 있어서 민심을 잃은 이유중에 가장 큰 이유가 서주학살을 이유로 들었죠 그리고 조조 사후 조조아들이 중국을 통일하고 사마평에게 일족이 몰살 당하고 1명빼고 다죽었죠
사마평도 사후 후손들이 모두다 몰살당해서 일족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방계는 살아있을수도 ..)
이후 역대 중국 왕들은 서주대학살을 비난했고 다른 중국 학자들도 2000년간 조조를 비난
이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조조가 인기가 없었습니다. 송나라때부터 조조는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삼국지가 위촉오 3나라가 배경인데 사실상 위나라가 한나라를 이어받아서 만든나라라
그냥 몰빵 수준입니다 경제 인구 군사등 당시 중국대륙 70% 이상이었습니다.
조조 옆에는 유능한 책사부터 장군까지 다 있었죠 이런 인재들을 데리고 조조는 살아생전에 통일을 못했...
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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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eeKay
24.05.21 · 118.♡.14.92
할인은 안하고 살인만 하니까요 -
아아찌
24.05.21 · 211.♡.128.35
조조전을 한번 하면 비호감도가 낮아집니다 -
Llache
24.05.21 · 218.♡.103.95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군주의 이상적 모습이 유비, 의리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관우, 주군의 꿈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공명. 주군의 아이를 위해서 100만명의 군사를 뚫고 아두를 구해내는 조자룡, 그런 조자룡을 지키기 위해서 장판파에서 100만의 군사에 홀로 맞서는 장비... 자기 목숨에 연연하는 조조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죠. -
던던진도넛
24.05.21 · 211.♡.96.205
중국 내에서 마오쩌둥이 조조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는데 (본인 스스로가 조조 광팬이라 평소에도 조조가 지은 시구 등을 자주 인용했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대다수 민중에게는 여전히 인기가 없죠... -
일일리어스
24.05.21 · 211.♡.22.79
사실 통일할 필요를 못 느낀거 아닐까 싶어요
서촉은 산 뿐이고. 강남은 뭐 밀림? ㅎㅎ -
Hheltant79
→ 일리어스
24.05.21 · 61.♡.152.147
촉이 먹은 한중과 촉은 한나라가 일어난 곳이라 한왕조의 정통을 이어받으려는 조조에게는 매우 필요한 땅이었죠.
그걸 아는 유비도 한고조 유방과 같이 한중왕을 칭했고요. -
일일리어스
→ heltant79
24.05.21 · 211.♡.22.79
조조는 끝까지 황제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으니깐요. -
Hheltant79
→ 일리어스
24.05.21 · 61.♡.152.147
"한 승상"인 조조에게도 이 지역은 상징적인 땅이었습니다. -
일일리어스
→ heltant79
24.05.21 · 211.♡.22.79
한 승상이고
명목상 한중왕은 한의 신하 아니에요?
한승상이 굳이 쳐야할 이유는 없자나요.
실제로 적극적으로 촉을 쳐들어간 횟수도 별로 없었던것 같고
오히려 촉에서 갇혀있다가 말라 죽으니 자꾸 북벌 하겠다고 나온것 같구요 -
Hheltant79
→ 일리어스
24.05.21 · 61.♡.152.147
한중왕이 한의 신하니까 더 쳐야죠. 그냥 벼슬도 아니고 "왕"인데 천자의 책봉도 안 받고 참칭한 건데요.
고려나 조선같은 외성책봉국에서 정변 등으로 책봉 안 받은 왕이 즉위했을 때도 그걸 빌미로 쳐들어온 일이 많았는데,
한 왕조의 발원지에서 조정에 적대하는 세력이 왕조의 시조와 같은 칭호로 왕을 칭한다면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죠.
그리고 조조가 입촉 후의 유비와 붙은 게 217년~218년의 한중대전 한 번인데, 이때는 조조가 한중을 먼저 차지하고 있었던 걸 유비가 빼앗은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관우의 북진을 막다 220년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유비의 익주 점령부터 계산해도 215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했을 때 조조는 한수/마초와 죽어라 싸우고 한중을 합병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조 생전에 "유비의 촉한"을 침공하지 않은 것은 필요성을 못 느껴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유비의 한중왕 즉위로 한 왕조에 애정을 거두지 않았던 당대 지식인들이 유비에게 지지를 보냈고,
이 여파로 위나라 내에서 수년간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조비의 한왕조 찬탈 후 한중왕이던 유비가 촉한 건국을 선포하면서 위나라가 실력에 걸맞은 정통성을 갖지 못하게 했고,
남송대 촉한 정통론의 근거로 쓰이기도 하는 등, 조위에게 촉한의 존재는 이만저만 골치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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