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뜨기 싸나이 노무현'에게 반했던 김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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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은 재수학원 대신
당구장에서 종일을 보내던 중이었다.
청문회가 한창이었지만
그 시절 그 신세의 그 또래에게, 5공의 의미는
쿠션 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 하는 게 옳겠다.
수구 앞에 섰더니
하필이면 티브이와 정면이었으니까.
사연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웬 새마을운동 읍네 지부장 같이 생긴 이가 눈에 들어 왔다.
그가 누군지 알 리 없어 무심하게 시선을 되돌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다시 등을 폈다.
'어, 정주영이네. 거물이다. 호, 재밌겠다.'
타임을 외치고 티브이로 달렸다.
일해 성금의 강제성 여부를 묻는 질의에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답함으로써
스스로를 군사정권의 일방적 피해자로 둔갑시키며
모두에게 공손히 ‘회장님’ 대접을 받고 있던 당대의 거물을,
그 촌뜨기만은
대차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몇 놈이 터트리는 탄성.
“와, 말 잘 한다.”
그러나 내게는 달변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서 모두가 자세를 낮출 때,
그만은
정면으로 그 힘을 상대하고 있었다.
참으로,
씩씩했다.
그건 가르치거나 흉내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를 알았다.
2.
이후, 난 그를 두 번 만났다.
부산에서 또 실패한 직후인 2000년 봄,
백수가 된 그를
후줄근한 와룡동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다.
낙선 사무실 특유의 적막감 속에
팔꿈치에 힘을 줄 때마다 들썩이는 싸구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때 오갔던 말들은 다 잊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기억나는 건,
담배가 수북했던 모조 크리스털 재떨이,
인스턴트 커피의 밍밍한 맛,
그리고
한 문장뿐이다.
“역사 앞에서, 목숨을 던질 만하면 던질 수 있지요.”
앞뒤 이야기가 뭔지,
왜 그 말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말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의 웃음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저만의 레토릭이 있다.
난 그런 수사가 싫다.
같잖아서.
저 하나 제대로 건사해도 다행인 게 인간이다.
역사는 무슨.
주제넘게.
너나 잘하셔. 그런 속내.
그가 그때 적당히 결연한 표정만 지어줬어도,
그 말도 필시 잊고 말았을 게다.
정치인들은 그런 말을 웃으며 하지 않는 법이다.
비장한 자기연출의 타이밍이니까.
그런데
그는 웃으며 그 말을 했다.
그것도 촌뜨기처럼 씩씩하게.
참 희한하게도
그게 정치적 자아도취 따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내게 전해진 건,
순전히 그 웃음 때문이었다.
난 그때 그렇게,
그에게 반했다.
두 번째 만남은
그 이듬해 충정로 해양수산부 장관실에서
대선후보 인터뷰로 이뤄졌다.
그 날 대화 역시 잊었다.
기억나는 건 이번엔 진짜 크리스털이었다는 거,
질문은 야박하게 했다는 거
그게 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라 여겼다.
- 사심으로 물렁한 건 꼴불견이니까.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
그리고 이 대목이다.
“시오니즘은 국수주의다. 인류공존에 방해가 되는 사고다.”
놀랐다.
그 생각이 아니라
그걸 말로 해버렸단 사실에.
정치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은 건 눙치고 간다.
그런데
그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게 현실 정치인에게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닌데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통쾌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이런 남자가
내 대통령이면 좋겠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그 후 대통령으로 내린 판단 중 지지할 수 없는 결정들,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씩씩한 남자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난 그를 정치인이 아니라,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진심으로 좋아했다.
3.
그래서
그의 투신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투신이라니.
그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일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에이 씨x…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담배도 없이,
경호원도 없이,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혼자가 되어,
그렇게 가버렸다.
그 씩씩한 남자를
그렇게 마지막 예도 갖춰주지 못하고 혼자 보내버렸다는 게,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다 어느 신문이 그의 죽음을 사거라 한 대목을 읽다 웃음이 터졌다.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그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맞다.
니들은 딱 그 정도였지.
그래 니들은 끝까지 그렇게 살다 뒤지겠지.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4.
내가 예외가 없다 믿는 법칙은 단 하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거.
그가 외롭게 던진 목숨은,
내게 어떻게든 되돌아올 것이다.
그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만한 남자는,
내 생애 다시 없을 거라는 거.
이제 그를 보낸다.
잘 가요, 촌뜨기 노무현.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콘헤드님의 댓글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이 말을 지키고 있는 김어준에게 반했습니다.
그가 말한 "우리"안에 저도 끼고 싶습니다.
셀레본님의 댓글의 댓글
0sRacco님의 댓글
지혜아범님의 댓글
유일하게 큰 목소리로 증인들 질타 하던
그 사 람...
노 무 현
solvalou님의 댓글
이 얼마나 간결하고 굳은 다짐인가요. ㅠ
버미파더님의 댓글
그 한 마디가 더럽다 고개 돌려버리라는 언론의 더러운 구정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정치판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더라구요.
사람은 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키워줄 안목과 실력이 부족할 뿐...
sunandmoon님의 댓글
포체리카님의 댓글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노 무 현...
총수는 너무 고마워요.
CMYY님의 댓글
또 그의 말에 동의를 하는 건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그의 말처럼 노무현 대통령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자에게 씩씩하고 시민을 생각하신 분, 노무현 만한 대통령이 또 우리에게 올 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시민들이죠. 정치에 외면하지 말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 같아요.
mussoks1님의 댓글